

파도의 격정


마침 나기사의 자비 덕분에 도가 지나친 장마로 앓고 있는 타지와는 달리 날씨도 화창하여 좋았으니, 조만간 졸개들을 정리한 후 여름 별장 '가시나무 요람'에 나기사를 초대할 것을 고려한 이바라가 잔을 들었다. 그런데 잔의 무게가 너무 가벼웠다. 저도 모르게 가슴까지 손을 올려버린 이바라는 그제야 텅 비어있는 제 잔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절반을 마셨다는 자각도 없었는데. 바깥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한 편, 나기사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점점 어리숙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어 이바라는 저도 모르게 띄운 당황한 낯을 재빠르게 지우며 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생기자 창을 넘어와 러그에 깔린 따스한 햇살을 쫓던 시선이 이바라의 손에 닿았다. 잠깐 뜸을 들인 나기사는 조금의 시간을 소모하고 나서야 이바라가 한 사소한 실수를 눈치채고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후 벌어지는 일은 익숙하지만 그와 동시에 적응되지는 않는 마법의 연속이었다. 마력이 움직이는 전조 현상도 없었지만 마치 공기를 들이켜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신비의 연쇄 작용에 이바라가 가만히 나기사의 힘이 벌이는 일을 지켜보았다.
먼저, 비어있던 잔이 갈색빛을 띈 따스한 차로 변한다. 자신이 접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향과 색이기에 이것이 무엇이냐 묻자 이내 동대륙에서 주로 쓰인 약재를 달여 차처럼 마시는 것이라 답한 나기사가 제 앞에 놓인 잔의 차도 같은 것으로 바꾸었다. 다음으로는 제 주인을 위해 정성을 들인 사용인의 마음도 모르고 담소가 이어지는 동안 서서히 식어간 찻잔과 내용물의 온도가 높아졌다. 여름이라 한들 지나치게 시원한 것을 들이켜 속이 상하는 것을 싫어했던 작년의 이바라를 기억하여 하는 배려임을 알아차리고는 작게 감사 인사를 표한 그가 더욱 밝게 변한 나기사의 홍채를 흘겼다. 그다음은 응접실의 온도가 서늘하게 변하였다. 감히 용을 파충류와 비견한 마음을 들킨다면 토라질 것이 뻔하지만, 아무래도 그늘진 사늘한 공간을 좋아하는 듯한 나기사의 취향을 반영한 듯했다. 각하께서는 이 계절만 되면 자신이 다녀간 방을 청소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용인들을 알고 계실지. 묵묵히 나기사의 마법이 차례대로 발현되는 양상을 보던 이바라가 속으로 생각을 삼키며 다시금 새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을 차를 들이켰다. 마땅한 주제를 찾지 못해 소리 없이 주변을 훑던 눈은 김이 피어오르는 이것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둥글게 휘어진다.
"향이 좋군요. 역시 각하의 안목은 수도에서의 사교에 능통하다 자부하는 저조차 쉽게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훌륭합니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렇게 베푸신 배려 덕분에, 각하께서 제게 사적인 영역을 내어주신 듯하여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할까."
"좋습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온기의 흔적이 너무나도 뚜렷하여 잠깐 목을 가다듬은 이바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극소수를 제외한 사람을 모두 물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에게 여름을 맞이한 휴가를 내어준 이바라는 일전까지만 하더라도 막힘없이 잘 이어지고 있던 대화의 화제를 떠올렸다. 짧은 회상 속에서 이루어진 대담은 겉으로는 '나기사를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대화였더랬다. 감히 불멸자였던 이의 과거를 묻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연회 이후로 마음을 굳힌 듯한 나기사가 먼저 운을 떼자, 이바라가 주도하기 시작한 대화는 마치 올바른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올 때 돛을 편 배처럼 매끄럽게 이어졌다.
주제는 간단명료했다. 어째서 란 나기사는 두 가지 일면으로 나뉘어야 했나. 제국의 정세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멸망과의 전쟁에 따라 급격하게 흐르고 있으므로 어쩌면 이바라의 일생과 가장 밀접할 이야기가 주를 이룬 대화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나지막이 나기사가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평소 나기사를 보필하며 보고를 하고 평가를 받았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에 묘한 들뜸을 느낀 이바라는 그에게 온전히 정신을 집중한 채, 나기사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호흡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정보를 수집해나갔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당시의 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도, 세계를 이룬 생명들을 이해할 여유도 없었어."
"어느 간악한 자가 그런 각하에게 접근한 것이군요."
"'간악하다'라. 후후, 이바라라면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네."
"해서 … 그는 어떤 자였습니까?"
"처음 본 인간은 빛이 났어. 아슬아슬하고도, 위태로웠으며, 동시에 견고했지. 나를 찾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불멸을 되찾는다면 그야말로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고 완벽한 내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게 나의 두 번째 오만이었던 것도 모르고. 잔의 손잡이를 거머쥔 손을 풀어낸 나기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당분간 초콜릿을 멀리하고 자신이 정해준 음식들을 섭취해 주셨으면 한다고 보고했을 때에나 보았던 실망의 표현을 이런 식으로 마주하자 새삼스럽게 자신이 경솔하게 그를 대한 것이 아닌가 돌아본 이바라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마주 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개념적으로 존재하던 것이 어떠한 자에게 인식된다면 영원히 그러한 것으로 남는다. 왜곡되기 쉽고, 흐려지기 십상인 '상징'. 동대륙의 인간은 나를 그들의 수호신인 용이라 여겼고, 나는 기꺼이 그러한 존재가 되어주었지."
"본연의 모습을 끝없이 변화시키는 세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보편적으로 역사에 남은 상징이니까요.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명확한 소원을 밝히지 않았어. ...내게 소원이 아닌 부탁이 있다 말한 그가 바람에 따라 수 세기를 살다 죽는 때가 되어서야 한 가지 소원을 내게 빌었다."
'다른 인간이 아름다운 당신에게 더 이상 욕망하지 못하도록 추악한 그들을 죽여주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영원히 동대륙의 용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천혜를 누리는 것은 저 하나로 족하니, 당신을 완벽하지 못하게 만들 단 하나의 존재로 남는 것으로 소원을 이루려 합니다.'
당신의 가치는 그것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릇됨을 뒤늦게 깨달은 내가 그의 소원을 거부하려 하였을 때, 검을 치켜든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붉은 피가 튀어 자신의 철릭을 적시던 때를 떠올린 나기사가 빨간빛이 퍼져나가는 차의 표면을 응시하다 입을 다물었다. 이바라 또한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숨을 죽인 채 실망으로 뒤덮인 낯을 바라보았다.
초년에는 제게 부여된 한 인간의 소원을 거부하여 도망치듯 서대륙의 신전을 찾아 그곳에 숨어들어,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도록 은거하였다. 그렇게 숨어든 곳에서 신을 찾아 죄를 고하고 저마다의 생에 부여된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고 학습하며, 발전해나가는 자들을 보며 인간과 다른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해나갔다. 그렇게 비로소 인간과 자신의 의지가 완벽하게 양립되었을 때.
"각하께서는 일면과 분리가 된 것이로군요."
"...여전히 불온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무의식이 떨어져 나갔어."
"저희가 멸망이라 부르는 것이 각하라면 … 그것을 죽이고 대륙을 안정화시키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당신은 완전무결한 용이 되는 겁니까?"
"응."
여름의 무더위에 쏟아지는 태양빛보다 더 뜨거운 전류가 피부 위를 겉돌았다. 어쩌면 나기사와 같은 완전무결한 무기를 잃는 것이 싫었을 과거의 인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린 이바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한때 이바라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친 나기사는 이것으로 되었느냐는 물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한 폭의 초상화가 제게 베푼 목소리에 잠시 말을 아낀 이바라가 테이블 아래의 발을 두어 번 까딱이고는 웃는 낯을 자아내며 입을 열었다. 비틀린 입매는 계책을 부려 당당하게 요구를 밝혔던 때와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당신을 소유한 저에게 있어 스스로 무기를 파괴해 상납하는 행위는 큰 손해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법 흐름을 달리하는 말이었지만 나기사는 어째서인지 이바라 다운 대답이라 여겼다. 게다가 개중에는 의외로 마음에 드는 어감의 단어가 내포되어 있어 숨을 들이켠 그가 이내 아까의 대답을 곱씹었다. 자신의 정체를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똑같지만, 이토록 당당하게 제가 모시던 자를 배반하면서까지 자신을 지켜내고 제대로 활용하겠다 포부를 밝혀오는 것이 여전히 신선하고 흥미로운 까닭이었다.
"나를 소유한다, 라. 후후. 그렇다고도 할 수 있군."
"반역을 꿈꾸는 불온한 분자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언제까지고 제국의 법과 높으신 분들의 말씀만 따른다면 자신의 것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이런 게 참으로 성가시다는 거죠."
"...내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아. 오히려 이바라 네게 협력하고 있으니까."
수도의 누군가를 떠올린 모양인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하는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 것조차 자신의 의무라 생각한 건지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며 이리저리 화제를 돌리는 이바라의 입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바라를 둘러싼 세상에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가 주로 붙잡고 고민하는 문제, 특히 자신과 관련해서는 그 스스로 제게 맡겨달라 부탁하였으므로 그저 동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을 이어가던 나기사가 슬금슬금 시선을 회피하는 이바라를 따라 눈을 움직였다. 그제야 이바라가 다시 한번 제 판단에 대해 불만이나 문제가 있느냐 물었다는 걸 깨달은 나기사가 제 눈치를 보는 듯 할 말을 고르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바라가 지나치게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의 기저에 깔린 불안을 줄여주기 위하여, 자신은 그의 선택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저트의 달콤함을 잊게 할 정도로 다정한 말에서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그의 박애주의적 사랑이 느껴졌다. 어째선지 거북함이 드는 것은 평소에 즐기지 않는 류의 간식을 지나치게 섭취한 까닭으로 치부해버린 이바라가 적당히 쓴 차를 찾아 손을 뻗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름에 따라 트레이 위의 디저트가 하나씩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장 아래층의 샌드위치만 남은 트레이를 스친 시선이 서로에게 닿았다. 나기사가 자신을 안정시키려 한 의도를 읽어낸 이바라가 차마 내뱉지 못한 감사를 삼킨 채 테이블을 두드렸다. 자기 증명은 여러모로 어려운 것이다. 눈앞의 용조차 그 긴 시간 동안 이루지 못할 정도로. 하물며 수 세기를 살아온 그의 지혜와 통찰로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실마리를 찾은 그 자기 증명을 한낱 인간인 스스로가 세상을 상대로 해내려 한 것이 오만일지도 몰랐다. 그래, 오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드러내려는 것과 동시에 나기사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처지에 놓인 이바라는 스스로 선택한 길의 앞에 놓인 둔덕의 개수를 가늠해 보았다. 나기사를 단순히 강한 무력을 지닌 인간으로 알고 있는 수뇌부로부터 지켜내고 제 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과, 그에 자신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 ...이바라 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판단한 것도 나의 일면이자, 선택이야."
"이런."
"인간의 순수한 욕구를 사랑하는 내게 불쾌한 건 너의 생존과 소유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나의 욕심으로 모두의 '욕망할 기회'를 박탈하는 나의 일부니까."
"위로를 받으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내 손으로 죽여버린, 순수하고 순진한 영혼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벌하려는 거야."
그들을 짓밟아버린 나를 용서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자신의 일면이자 멸망을 죽이려는 의지에 오로지 너의 명령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말한 나기사는 잠자코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바라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조차 경멸과 증오의 대상으로 삼을 줄은 몰랐기에 그런 나기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상황인지 계산하듯 미간을 좁혔다. 분명 그래야 할 때는 맞는 것 같으나, 진심을 담아 상대를 위로하는 것만큼 낯간지럽고 허울뿐인이라 여겼으며 하물며 그런 경험조차 없었던 이바라는 귀 끝을 붉히며 입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 더구나 그런 상황 속에서 나기사조차 이바라가 머뭇거리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이쪽의 대답만을 기다리니, 아까의 차가 남긴 쓴맛을 뼈저리게 느낀 이바라는 테이블 위의 손을 거두어 제 브로치로 변모된 아쿠아마린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착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제 이득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 괴로운 운명의 흐름에 불멸을 잃은 용을 도우려는 선량한 베풂의 의도는 없으니까요."
그래. 분명 그런 생각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말속에서 부담스러울 정도의 부끄러움과 낯간지러움에 쫓겨 소멸되어버린 의미의 다정이 있음을 눈치챈 나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쌀쌀맞고 인정 없는 척을 하여도 자신이 내어준 계약의 증표를 그리 매만지며 눈치를 보니, 비록 영역 밖의 존재들에게는 철저하고 계산적인 이바라일지라도 저에게는 유독 어리숙한 구석이 강조되는 이바라의 속뜻을 알 수밖에 없었다. 잠깐. ...영역 밖? 자신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단어를 곱씹는 순간 기계가 고장 나듯 찻잔을 들어 올린 채 멈춰버린 나기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앗핫하! 이런 게 인간이다, 이런 것부터 배워나가시는 겁니다!"
중얼거리듯 말할 때에는 아쿠아마린을 살피느라 그런 나기사의 변화를 미처 알지 못했던 이바라는 호기롭게 웃음을 내뱉은 뒤에야 그 놀란 표정을 발견하고 말았다. 뭐지. 방금 한 말에 문제가 있었나. 턱 아래를 가릴 정도로 기울어있는 잔을 보며, 이바라는 그 와중에도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는 액체의 신비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런 이바라의 탄성이 들려오든 말든 자신 스스로가 이바라의 영역 속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던 무의식과 마주해버린 나기사가 손끝을 떨었다. 때로는 저로 인해 만들어진 전장 위에서의 경험으로도 충분하다며, 때로는 자신의 보필을 이용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라며 선 하나를 두고 자유자재로 그것을 넘나들었던 이바라의 영역을 온전히 파악하지도 못했다 여기던 때의 신선한 충격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런 내게 요구하는 게 …… ."
"그 어떤 격랑이 있더라도 아름답고 고고하며 긍지 높게 있어주시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각하. 아니. 그래주십시오. 가장 최악이고 최저의 일은, 오명은! 저 하나가 뒤집어쓰는 것이 효율적이니까요!"
...너의 곁에 존재하는 것. 너무나도 모호하고 방대하여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다 여긴 울타리의 경계에서, 사실은 영역의 밖이 아닌 그 중심에 서서 헛된 고민을 품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뛰었다. 찻잔의 열기조차 따라 하지 못할 열락이 대양인 줄 알았던 옹졸한 제 그릇을 멋대로 끓어넘치게 하였다. 여름의 무더위는 찾지 못할 이상적인 낙원이 되어버린 아름다운 이바라의 영토에서, 제게 일절 영향을 끼치지 못할 때늦은 요열의 흔적을 발견한 나기사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까의 달콤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감미로움이 제 영혼을 스쳐 봄을 끊어버린 여름의 잔혹무도한 더위를 모방하여 전신의 말단을 간지럽게 했다.
"부디 안심하시길.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인한 인간입니다. 반드시 저와 각하의 안위를 책임지고 옳은 방향으로 마무리 지을 것이니, 각하께서는 지켜봐 주십시오."
나기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는 말은 결국 상대에게 제대로 닿지 못했다. 길고도 후덥지근한 빗줄기가 쓸어간 길에 남은 따사로운 자욱처럼 점차 짙어지는 이 감정의 이름을 언젠간 깨달을 수 있으리라는 한 줄기 확신만이 저에게 있어 가장 명확하고도 흥미로운 것이었기에. 나기사는 그 작은 손으로 자신의 안위마저 책임지겠노라 장담하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 만난 인연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이바라의 뇌리에 남는 기억의 대부분은 모두 여느 여름 무렵, 그의 각하와 함께 하는 때였다.
"저, 각하."
성이 난 것도 아닌데 모가 난 듯한 어투에 꽃을 들여다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올린 나기사가 저를 내려다보는 이바라와 눈을 마주쳤다. 실내에서는 피부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시원한 온도를 선호하시는 분이 바깥에만 나오면 더위도 모르고 제 관심을 사로잡은 것에 몰두하는 광경이 이제는 익숙해야 할 때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나기사의 취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이바라가 양산 아래서 숨을 골랐다. 대저택의 정원이 무식할 정도로 넓어서 다행이었지, 여타 대귀족이 아닌 자들의 거처였더라면 이 엄청난 활동력을 어떻게 감당해야 했을지 상상한 이바라는 곧 그를 책임질 자는 자신이 유일하며 그런 스스로가 대귀족이 아닌 위치에 있는 것을 상정할 수조차 없었기에 생각을 접기로 했다. 제 머리를 뒤흔드는 아찔한 현기증은 각하의 일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이 무더위에 오래도록 노출된 까닭이었을까. 아무리 물어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홀로 집어삼킨 이바라가 제 손에 들려있던 양산을 나기사에게 건네었다. 아침 즈음에나 잠깐 보였다 기화되어버릴 이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그를 걱정하는 듯한 말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도 그때였다.
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빌어먹도록 청명하다. 제 피부를 찢어발길 듯 내리쬐는 빛을 거닐며 집사의 만류에도 나기사를 찾아 나섰던 이바라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의 피부를 흘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주제에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반복된 버릇으로 주름이 생길 때가 된 미간을 꾹꾹 눌러 펴낸 이바라가 용건을 묻는 시선에 다른 손에 들린 양산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제멋대로 빛을 반사하던 안경은 물론 그 얼굴을 모두 뒤덮는 그림자를 따라 스쳐간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져 그 발치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풀에게 닿았다. 더위와 품행에 관련된 잔소리가 이어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신경을 돌린 나기사는 열이 오른 이바라가 잘도 조잘대는 목소리를 음악으로 삼아, 연회를 즐기듯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잎을 흔드는 정원의 화원을 바라보았다.
나기사가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걸 알더라도 습관적인 수다─이런 표현도 알게 된다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겠지만─를 멈추지 못한 이바라는 그러고도 장장 7분가량을 떠들어댔다. 그가 숨을 고를 때면 방금 제가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시느냐 물을 것이 뻔하기에 반복적으로 "응."하고 대꾸를 해주던 나기사가 먼저 제 손에 들린 돌 하나를 내어주는 순간까지도, 이바라는 쉴 틈이 없는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갑작스레 아래에서 위로 뻗어오는 손과 그 위에 들린 어딘가 익숙한 돌을 발견한 이바라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제 가슴팍에 있어야 할 브로치를 찾았는데, 언제 들고 가서 고쳤을지 모를 아쿠아마린이 나기사의 손에서 원석의 형태로 존재함을 깨달은 이바라가 그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계약의 증표는 있는 그대로의 형태가 좋아. 그런 말을 덧붙인 나기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앞의 꽃을 바라보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응."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실 게 분명하기 때문에, 대충 찬사의 말을 지껄이며 화제를 돌리려 했던 이바라는 곁에 물줄기를 만들어내어 화원이 메마르지 않도록 마법을 부리는 나기사의 행동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드디어 본론이다. 간혹 홀린 것도 아니면서 나기사의 저런 행동에 말려 제가 할 말조차 잊고서, 한참이 지나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후회와 자책을 동시에 해내야 했던 이바라는 이번에도 그에 당할 뻔했다 생각하며 나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쉽게 지탱하여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에서 나온 손길에 붉은 눈으로 이바라의 장갑 덮인 손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기사가 눈을 접어 미소를 보이자, 괜한 더위에 시선을 돌려 날숨을 뱉은 이바라가 바닥에 생겨나는 거대한 그림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의미 없는 이상한 것은 사 오지 않으시는 게 좋다고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아, 결국 그 방을 발견한 건가?"
"맙소사! 결국이라뇨!"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에서 짜증을 느낀 듯한 이바라가 기어코 휘청대듯 뒤로 물러나자, 바람을 끌어와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등을 지탱한 나기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용돈'이라는 것을 줄 테니 무료하실 때에는 수행원을 대동하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조촐한 로브를 쓴다는 가정 하에 영지 내에서의 외출을 허락한다는 말이 있었고, 자신은 그 제안을 따랐을 뿐이었다. 나기사가 적어도 주제의 중심에 있는 물건들 정도는 파악하고 있으리라 여겼던 이바라는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듯한 표정을 발견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곧 그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답답하다는 듯 "본래의 가치를 잃고 기능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골동품 말입니다! 각하께서 친히 쌓아놓으신 골동품이요!"하고 외치고 나서야 탄성을 내뱉은 나기사가 의아하다는 듯이 이바라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오래된 것에서 의미를 찾고 탐구하는 행위는 나의 가치를 찾는 것과 같아. 스스로를 통찰할 수 없다면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대체품을 찾아 연습하는 것 또한 현명한 선택 …… . ...인간을 따라 학습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린 걸까?"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목소리와 표정에 과장된 반응을 거둔 이바라가 어느덧 자신보다 높아진 눈높이로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다 마른침을 삼켰다. 각하와 함께 나서지 못해 통탄스럽기 그지없다는 말을 중얼거린 그는 티타임이 준비되었으니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자며 나기사를 이끌었다. 이에 매일 보는 풍경임에도 잠깐 뒤를 돌아본 나기사가 커다란 뭉게구름이 내린 그림자에 진한 빛을 띈 꽃들의 낙원을 응시하다 이바라를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 최근 접한 책에서 아이들은 토라질 때면 볼을 부풀리곤 하는 것으로 묘사가 되었는데, 자신의 눈에는 한참 어린 나이에 불과한 이바라가 인간의 수명을 기준으로는 건장한 청년임을 이상한 데에서 실감한 나기사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바라가 뒤를 돌아본다면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뺨을 집어보려는 의도였다. 얼굴에 한껏 피어난 미소를 걸친 나기사는 이윽고 이바라의 대답이 들려옴에 최대한 기척을 줄인 채 손을 뻗었다.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바라는 나기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최악의 상황을 자주 접했다는 것이고, 개중에는 근접한 상태에서의 암살 시도도 있었다는 점이다. 나기사가 은밀히 움직인 손가락이 제 뺨에 닿기도 전에 날렵하게 몸을 틀어버린 이바라가 제게 닿으려는 손을 붙잡았다. 언제 놓았을지 모를 양산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놀란 집사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놀란 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그제야 자신이 과하게 힘을 줘서 나기사의 손목을 잡아챈 상태임을 자각한 이바라가 간결한 사과와 함께 그를 놓아주었다. 일렁이는 당황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린 나기사는 바람을 일으켜 양산을 허공에 떠오르게 하며 눈을 곱게 접었다. 그 의심스러운 미소에 흠칫 어깨를 떤 이바라는 머리카락에 꽃잎이 묻어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도 그러셨느냐 대꾸한 뒤, 계속해서 걸음을 걸어나갔다. 그렇게 세 걸음 즈음을 나아갔을 무렵일까. 마침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고개를 반쯤 돌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경제관념이 자리 잡지 않은 각하께서 아무런 골동품을 비싸게 매입하시는 덕분에 영지에 의문의 부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 지경입니다."
신예 예술가가 이사를 온 것도 아니고, 하물며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더라도 망설임 없는 선택을 하니 온갖 말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골목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 몸을 맡긴 소문 중 가장 주류가 된 이야기가 바로 '변경백령에 의문의 부자가 나타났고, 그는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 조금만 오래된 골동품이라도 모조리 매입한다더라'라는 것이었다. 이바라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보고를 해오는 수행원의 말에 지끈거렸던 이마를 붙잡았다. 원하시는 것을 잘 피력하지도 않으시는 분이 유독 이런 부분에서만 자아가 강해진 것처럼 굴었다. 그렇지만, 그의 각하에게 인간의 복잡하고도 머리 아픈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과하지 않은가. 결국 하는 수 없이 나기사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보다 그를 설득하는 방향이 옳은 결과를 도출해낼 것이라 판단한 이바라가 제 손 위로 떨어지는 양산을 받아 들며 말을 이었다.
"감히 각하의 취미활동을 저지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디! 조금만 자중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실은, 나기사와의 지속적인 호감을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라 방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심지어 일부 눈치 빠른 자들이 은밀히 선물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축하해, 이바라."
"제가 아니라! 각하께요! 거절해도 문제없는 자들이기에 제 선에서 정리를 하고 있지만 이런 일이 용인되는 게 서서히 퍼지게 된다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안일하고도 느슨한 범주에서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일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이 움직인다면 말이 달라진다. 이바라는 폭약이나 다름없을 불확실한 경우의 가짓수를 가정하는 것으로도 자신의 전장에서는 도저히 용인되지 않는 일이라 강조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쉽지만 다른 취미를 추천드리려고 고려는 하고 있었다는 말까지 덧붙인 이바라는 어느 순간 멎어버린 발걸음 소리에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민과 불만, 그리고 걱정은 거기까지였다. 그에게만 한정적으로 따사롭고도 부드러운 햇살을 등진 채 나기사가 짓고 있는 표정을 보고는, 그 천하의 변경백 이바라조차 결국 함께 잠행을 나서서 팔자에도 없던 골동품 수집을 하게 되었다는 말만이 대저택의 사용인들 사이로 더디게 흘러나갈 뿐이었다.
사늘한 바람이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와 귓가의 머리칼을 스친다. 포엣셔츠 너머로 나부끼는 은발 위로 산란하듯 퍼지는 빛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나기사는 익숙하지 않은 잠깐의 평화를 만끽하듯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멸망과의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던 이바라의 바람에 따라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빈지 어연 4년. 잠깐 과거를 회상한 그는 자유로운 전령이 제 머리카락을 헤집도록 두었다. 완전무결과 일보 멀어졌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능소능대한 용의 평온을 알아차린 듯, 먼발치에서 숨죽인 수림으로부터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바라와 원 없이 누릴 여느 여름의 휴식이 내어준 고요를 해치려 드는 적잖은 소란스러움을 걸러내던 차에 스쳐온 맑은 소리는 사늘하게 감긴 눈을 천천히 뜨도록 종용했다.
눈꺼풀 아래로 숨었던 붉은 눈동자가 끝없이 파도치는 해변가를 응시했다. 언젠가 이바라가 무료함이라 이름을 알려주었던 감정이 조금씩 차오르던 적적한 때였다. 창공을 가르는 작은 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기사는 까만 점이 생겨난 해변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작기만 한 날개를 바쁘게 움직이며 날아가는 새를 쫓는 고개가 느리게 움직이며 서류를 검토하던 푸른 시선을 잠깐 독차지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바라가 이쪽을 흘겼다 다시 서류에 눈길을 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기사는 그런 그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어느새 점이 되어 멀어지는 새의 분주한 날갯짓을 관찰했다. 땅에 속박되지 않은 자유의 산물이라는 단조로운 평가가 따라붙은 위대한 비행은 그 짧은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고작 하나의 깃털을 남긴 채 드넓은 창해의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이끌려 먼 곳의 해수면 위로 안착하는 갈색 깃이 소리 없이 침몰한다. 서대륙을 잡아먹은 종말과의 전쟁이 끝나가기에 이런 유례없는 여름휴가를 얻어 이곳 '가시나무 요람'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냐 물어보려고 해도, 이바라가 문서를 검토할 때에는 건들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었음에 나기사는 그저 먼 곳의 대해를 응시하기만 했다. 끝이 다가와버린 계약으로 묶인 관계의 한계가 으레 그렇듯 이쪽으로는 한 번의 감시만으로 끝나버린 관심이 곁의 보좌관들에게 흩어지는 것은 동요 없이 예사롭게 무시한 채였다. 다만 그런 사고의 끝에 이바라가 휴가를 얻었음에도 이틀째 밤잠을 줄여가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온갖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아주 잠깐 제멋대로 그의 집중을 흐트러뜨릴 것을 고려한 눈이 잘게 떨렸다.
"...이바라."
결국, 더운 날씨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품행을 강조하기 위해 제복 코트를 어깨에 얹고서 바쁘게 손과 입을 놀리고 있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입을 떠나고 말았다. 파랑에 휩쓸려 깃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야 고요하게 한곳만을 진득하게 응시하던 시선이 움직이며 해변을 따라 덧없는 소리를 내고서 흩어지는 포말을 스쳤다. 장대한 자수화단을 등진 채 화려한 길의 끝에 자리한 해변을 바라보며 부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서로 마주하지 않아도 이바라가 피로와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본심을 숨기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나기사는 이내 말을 아끼듯 입을 다물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것이 그와 자신이 갖기로 한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초석이었으니. 자신의 이바라가 부디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무언가를 고민하듯 소리 없이 굴러간 눈이 다시금 수평선에 닿았다. 이바라와 거쳐온 세상은 사방이 메마른 숲이요 비린내 가득한 전장으로 변모한 황야였기에, 나기사는 바다가 붉게 물든 광경에서 산들바람을 따라 몸을 뉘는 갈대 군락의 황금빛 물결처럼 푸르되 붉은 해면 위로 찬란하게 부서지는 석양을 보았다. 대해와 하늘이 맞닿은 선을 따라 펼쳐진 광활한 경관을 따라 한 쌍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움직였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저를 재촉하듯 불어오는 바람에 채광창 아래로 흐드러지는 휘장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그래. 모처럼의 휴가이니. 턱을 괴려던 손으로 입가를 가린 나기사가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잔뜩 굳어있는 동그란 머리를 살폈다. 역시나 시선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듯 미세하게 흠칫 튀어 오르는 어깨로 향하려던 시선은 결국 새하얀 휘장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물길로 고정되었다. 고민은 짧았다. 분명 이바라가 탐탁하지 않게 여길 것이 뻔하지만 나기사는 자신만큼이나 초연하게 메말라가는 그에게 여유를 찾아줄 의무가 스스로에게 있다 판단하였다. 그제야 늘 한결같이 일자로 닫혀있던 입매가 녹아내리듯 움직여 옅은 호선을 그렸다. 이바라로부터 세상을 배워나간 삶이 그랬듯 그를 닮은 버릇이 판단이 서는 것과 동시에 몸을 움직이도록 종용한 까닭이었다.
이바라는 용에게 인간의 관계를 주고 자신의 병기이자 각하로 삼은 자 다웠다.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신경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거리를 내어주었던 자신이 테라스를 벗어나는 순간 푸른 눈 한 쌍이 이쪽을 쏘아보았으므로, 금세 제 판단이 옳았음을 직감한 나기사가 조용히 퍼져나가던 미소를 감추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쁜 감정을 깨닫는 순간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아쉬움에 얕은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걸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실, 이바라의 영역에 자신이 있음을 이런 방법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오랜 전쟁이 끝에 다가설수록 '무기'로서의 가치가 격감되어가고 제국 황실에 경계당할 위험만 커져가는 저에게 바치는 정성의 정도가 줄어들었지만,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계약으로 이어진 관계의 한계가 어디에서 밑바닥을 보이는지조차 이바라가 알려주었기에. 나기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정의를 묻지 못하고 과업처럼 주어진 감정을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각하."
"응."
점차 깊어지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쉰 나기사는 물거품이 일어나는 바다까지 단 한 걸음을 남기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파도의 시끄러운 아우성 따위에 가려지지 않는 뚜렷한 부름이었다. 이바라가 자신을 부를 때의 확고함이 묻어나는 울림이 저에게 닿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서 귓가에 와닿았으므로, 나기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답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이바라의 모습이 온전히 시야에 담겼다. 여전히 테라스의 자리를 지킨 채 한 손에는 낱장의 문서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깃 펜을 움켜쥔 이바라의 실루엣이 흔들거리는 백색 장막에 맺혀 아른거린다.
"외람된 생각입니다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바라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부디 제 시선이 닿는 곳에서 대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전능하고 지혜로우신 각하와 다른 평범한 인간이기에 모든 변수에 대응하고자 늘 각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폐부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숨을 삼켰다. 이는 색다른 자극이었기에 생경한 느낌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간신히 짜내듯 끌어올린 숨결로 말문을 막은 나기사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불쾌함을 밀어내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너도 좀 쉬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자조하듯 튀어나온 허탈한 웃음 외에는 무엇도 표현할 수 없었다. 차라리 용건을 밝히는 말이었더라면 이렇게 심기가 뒤틀리지는 않았을까.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무슨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수면 아래의 세계처럼, 나기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서서히 굳어가는 입매를 매만졌다. 자신의 전유물이었던 눈길조차 보고서에 못 박아둔 채 겉으로만 부드러운 어투로 하는 말이 속절없이 자신을 일그러지고 말게 하는 것에, 나기사는 욕망을 동력으로 하여 움직이는 이바라의 가장 첫 번째이자 최후의 것이 곧 자신이라 여겼던 오만을 조우하여 씁쓸함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대륙의 패자에게 꿀리지 않는 자가 되기를 원했던 이바라의 뜻을 따라 그의 영역을 보호하고 자신을 상처 입히지 못할 전장에서 그를 위해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한들, 정작 이바라는 종말을 몰아세우고 만인을 무릎 꿇리는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목적만을 품고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란 사실을 원치 않은 때에 마주하게 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도. 이바라가 자신이 부재하는 미래를 피하기 위해 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음을 알지만. 마음이 동요하여 어쩔 수 없이. 풍랑을 맞닥뜨린 배가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앞으로만 나아갈 수 없듯.
원하는 목표가 가까워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계약이 결말에 도달하게 되자, 이바라는 평소의 여유를 잃어버린 듯 서서히 나기사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이 휴가조차 정비하기 위함이라는 명목뿐이었을 것이다. 이바라의 말이 맞았다.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용의 이름을 숨긴 그저 '뛰어난 인간'에 불과했던 자신이 하는 사소한 행동마저 그의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일으키고 마니까. 생존에 위협받지 않기 위해 남을 짓밟기를 종용 받았을 이바라에게는 소원이 성사되기 직전의 자신이 만들어내는 모든 변수가 그저 불안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붉은 노을을 등진 어깨너머로 드리운 그림자가 덧없이 흔들렸다. 전쟁의 위상이었던 적갈색 눈동자가 이바라와 곁의 보좌관들을 훑으며 그 주인이 겪는 혼란을 숨기기 위해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였다. 이바라. 나를 통해 세상의 가장 높고도 찬란한 자리를 도모하는 너는 나의 욕망이자 평범한 인간이며 그와 동시에 가장 타락하게 된 묵빛에 불과하기에, 결국에는 나의 예상을 벗어난 채 빛나지 않는 자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서야 너는 생기 있게 살아 숨 쉬며 안락함을 느낀다. 빛을 품은 나의 인도가 상실된 때를 가정하기 시작한 너의 영역에 내가 있을 자리를 지워나가는 너는. 길지 않은 상념을 끊어낸 나기사는 서류를 넘기며 다음 사안을 검토하는 이바라의 곁으로 바람을 불러 모았다. 여느 풍랑조차 피해 가는 해변가의 고요는 종말과의 전쟁을 피해 달아난 만물에게 평온을 주었으나, 바닷바람에 삭아가는 여느 역사의 기록처럼 바스러지는 계약은 이를 견뎌내지 못한 채 점점 지쳐갈 뿐이었다.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종용한 목소리가 끊긴 까닭에 붉은 수평선과 푸른 정원을 번갈아 응시하던 나기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례없이 변덕을 부리듯 고압적인 모습을 보이면 분명 이바라는 불안해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도를 지나친 무례에 사과를 건넬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쟁의 죄악이 뒤섞인 것처럼 새까만 주제에 그 스스로가 나약한 인간임을 나타내는 연한 살갗으로 불안에 뛰는 박동을 숨기고 있을 그를 머릿속으로 그린 나기사는 이내 허공에 손을 올려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신의 영혼을 두 갈래로 나누어 놓은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편의를 넘어선, 자신조차 정의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잔잔한 물길에 파랑을 일으킨 나기사는 그제야 이쪽의 변화를 알아차린 인간들이 혼비백산하게 흩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감히 첨언하기에도 송구스럽지만, 이런 때일수록 힘을 아끼셔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있어 은총이자 숭고한 신이신 각하께 병법을 논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 "
하아. 적절한 휴식은 뛰어난 품질의 무기만큼이나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불만을 드러내듯 길게 이어지는 말을 끊어낸 나기사가 형체 없는 힘으로 이바라를 제 곁으로 끌고 오며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끌려와서는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얕은 수심의 바다에 앉혀진 그가 보인 반응은 나기사가 예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갑작스러운 변덕에 으레 인간들에게 그러듯, 하물며 골동품을 지나치게 구입한다며 불만을 말했던 때처럼 화라도 낼 줄 알았으나 아첨에 가까운 말 한마디를 툭 내뱉고는 그저 웃는 낯만 보인 것이다. 더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직 불안정적인 전능함을 지닌 각하께서는 휴식기에 적당한 균형을 갖추어'로 시작되는 설교가 이어졌으니,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이바라의 속내를 살피려 움직인 시선이 쉼 없이 움직이는 입가에 닿았다. 잠시 숨을 고른 나기사는 이바라의 설교 아닌 설교가 끝을 맺기 무섭게 바다 위를 내달리던 바람을 멈춰세웠다. 눈꺼풀이 닫혔다 열리는 속도에 맞춰 일렁이는 잔바람을 따라 숨을 내쉰 그는 자신의 마음이 마주한 불명의 기분에 이끌려 요동치는 수면을 짚고서, 그의 바람대로 홀로 고고한 위상을 유지한 채 느긋하게 이바라의 곁에 앉았다.
분명 이바라가 어투로나 표정으로 내보인 그의 심정은 심연의 기저로 곤두박질치는 것과 다름없는 두려움이었다. 무엇이 이바라로 하여금 그런 감정을 갖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그것이 그가 자신을 쌀쌀맞게 대하도록 하는 원인이라는 짐작 외에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던 나기사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일관적인 냉대가 이어졌더라면 이러한 혼란의 자극에 휩쓸릴 일도 없었으나, 이바라가 저런 말을 할 때 들려오는 목소리만큼은 5년 동안 보인 것처럼 한없이 세심하였으며 또 다정했으니. 이를 입 밖으로 내뱉는다면 그는 자신이 그럴 리가 없다며 소스라쳐서 부정하려 들겠지만 나기사는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분명 저에게만큼은 따스했다 여기고 있었다. 이름 없이 존재했던 영겁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세월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이바라의 각하로서의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 나기사가 비뚤어진 입술을 한 채 그를 끌어안았다.
"제게는 항상 각하의 언행이 계명이자 신의 분부임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하신 망할 행동은, 아니, 실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제가 이런 곳에서도 태도가 흐트러지는 건 좋지 않다고 …… !!"
"요즘은 달라진 이바라가 별로 좋은 계책을 세우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이런. 제 판단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역시 각하, 자애로우신 분! 감히 각하의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게 한 이 무지한 사에구사 이바라에게 천금같은 가르침을 주시다니! 이거, 황제의 하명을 듣듯 경건한 자세로 경청하도록 하죠. 하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이바라. 전체에 눈이 팔려서, 작은 것들을 조금씩 놓쳐가는 네게 하는 충고를 새겨듣길 바라."
무엇이 이바라를 조급하게 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네가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거든. 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 놀란 이바라가 상체를 뒤로 빼내려고 하자 그를 조심스럽게 당겨 더욱 깊이 몸을 겹친 나기사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서로의 박동으로 닿은 온기가 낯설었던 까닭인지 이바라의 얼굴에 처음으로 접대용 미소가 아닌 경직된 표정이 떠올랐음을 확인한 나기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완전무결로의 지나친 욕망은 너를 다치게 해. 사람이란 작고 약한 존재니까."
그러니 네가 택한 내가 대신하여 욕망하도록 하지. 어르달래듯 꺼낸 말을 마친 나기사가 먼저 몸을 떼어냈다. 붉은 노을을 이끈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다. 당혹감에 귓바퀴가 붉게 물든 이바라가 꽤나 불충한 눈빛으로 나기사를 한차례 쏘아보았다. 미처 놓지 못해 바다에 빠져버린 서류를 훑었던 시선이 기어코 자신을 파도 속으로 끌어당긴 당사자를 담았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혼잣말이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아닐 게 분명한데, 명백한 짜증과 당혹이 혼탁하게 뒤엉킨 목소리로 욕지거리 따위를 읊은 이바라가 수면 아래로 사라져가는 문서의 흔적을 집었다 놓아주었다. 그런 이바라를 관찰하며 그의 푸른 눈을 닮은 바다와도 어울리지만 역시 붉은 머리카락에 한여름의 석양이 담길 때가 가장 찬란하다 생각한 나기사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물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이바라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비열한 협박으로 누군가를 내게 얽매는 짓을 하지 않았을 거야."
습관처럼 차음막을 두른 나기사가 하는 말에 이바라가 그를 응시했다. 마치 겁박해서라도 자신을 꽁꽁 묶어두겠다는 포부와도 같은 어투와 내용에 의아한 시선을 보낸 이바라는 머리카락을 넘긴 손이 귓가를 매만지다 물러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스치듯 보아도 여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완고한 의지가 적갈빛 홍채 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자신조차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그가 하는 말을 모조리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바라, 지금의 나는 달라졌고 성장했어. 나는 이바라의 곁에 있으면서 기꺼이 너와 함께 진흙탕의 가장 밑바닥까지 가라앉았으니까."
"하지만 저는 …… ."
" ...저들을 쫓아내고, 나와 함께 이곳에서 쉬는 거야. 일련의 행동은 이바라에게 어울리지 않아. 감히 이바라가 너를 믿고 사랑하는 내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세상이 고심하여 빚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낯이 다사로운 미소를 자아내며 달콤한 말을 하였다. 영원토록 창공을 빛낼 것 같았던 태양조차 하루에 한 번은 하늘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완전무결로 귀결되는 통제와 곁의 온기에서 안정을 느끼는 이바라가 스스로 불안에 몸을 내던진 까닭을 찾는 시선이 그의 얼굴을 배회했다. 뜨거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군 이바라는 나기사의 의지에 의해 물을 머금은 채 파도에 찢어졌던 서류가 모여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나기사가 한 이야기의 마지막 마디는 질문이 아닌 단정이었으므로 이바라는 그저 경청하는 듯한 자세로 그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머리를 넘겨주었던 손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놓쳐버린 것도 그때였다. 다시 한번 일렁이는 수면 위로 떨어지는 문서의 표면에 각인된 잉크가 덧없이 허물어진다.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은 이바라는 그제야 나기사가 지적하는 자신의 잘못을 완전히 이해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오신 겁니까."
"네가 나를 위해 준비해 주었던 수도의 사교계에서."
"그 건에 대해서는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기뻤어. 인간들의 원초적인 사회성을 여과 없이 배울 수 있도록 이바라가 신경 썼다는 것도, 덕분에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도."
몰아치는 전장으로의 출장 덕분에 그나마 이바라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인간성마저 모조리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덧붙인 나기사가 작게 웃었다. 네가 가르친 욕망이니 가장 잘 아는 것도 너일 텐데. 그리 말하듯 휘어진 눈이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고 있음에 마른침을 삼킨 이바라가 제게서 멀어지는 서류의 유해를 흘겼다. 사본도 존재하지 않는 저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서인지 떠올렸다 지워낸 이바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지도 못한 채 파도의 흐름에 따라 제 살갗을 스치는 물길에 빠져버린 것처럼 혼미한 정신을 부유했다. 저건 한여름의 아지랑이와도 같은 여름의 휴일에 해내야 할 업무들 따위가 아니었다. 멸망을 몰아낸 이후에 '란 나기사'라는 인물의 막강하고도 경이로운 힘이 어느 곳을 겨눌지 알 수가 없어 깊은 유감과 우려를 표한 황제, 그리고 그의 측근들에게 해야 할 자기변호이자 최후의 방어 수단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황제의 신임을 얻는 변경백으로 철저히 국경 수호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필히 토벌해야 할 멸망의 소멸 이후로 제 영역에서 사라져버릴 용 나기사의 부재를 설명할 … .
"여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바라."
"앞으로의 동향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수집하고 뒷작업을 하는 자리를 만들기에 가장 편한 시기이니까요. 감언이설만을 바치는 것이 진실한 충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와 함께 시장을 거닐며 오래된 물건들을 골라주었던 너의 상냥함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네가 그리는 계획의 미래에 여전히 자신이 최전선에 있음을 알면서도 직접적으로 나와 거리를 두려 하는 너의 말을 듣게 될 때에는 도저히 실망을 숨길 수가 없다. 상대를 허물어뜨리고 베어야 살아남는 전장에서조차 시야가 닿는 곳에 머무르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던 이바라의 역설적인 태도에 혼란을 느낀 나기사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너를 사랑하고, 믿고 있으니까. 나의 뜻을, 욕망을 밝히지 않더라도 너는 나의 말을 대신하고 원하는 말을 내뱉으니. 굳이 나의 권한을 휘둘러 너를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어."
어쩐지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이바라가 당장 고개를 들어 그런 나기사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음에도 멋대로 깨어져 비틀린 눈빛을 이해하기에는 당장 그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해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이바라는 당혹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기사에게 변명하듯 내뱉을 말을 재빠르게 골라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제 제안을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적어도 이유 정도는 알려주었으면 좋겠어."
복잡하게 일그러지는 이바라의 얼굴을 면밀히 살피다 말고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에 달린 브로치를 잡아당긴 나기사가 속삭이듯 한 줄기 숨결과 함께 부탁을 내뱉었다. 평소의 그에게선 보지 못한, 그리고 볼 일은 없으리라 여긴 우울의 범람을 목도한 이바라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말았다. 잠에 빠져들 때 외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금속 핀으로 고정했던 브로치는 자신을 만들어낸 창조자의 손길에 너무나도 쉽게 떨어져 나가버린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계약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표였던 아쿠아마린을 거두어간 나기사는 여전히 어두운 낯을 한 채 제가 선물해 주었던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 ...나는 항상 이바라의 뜻을 따라 소망을 이루어주고 있지만 결국 상호 간의 이용 관계. 너와 나의 관계가 계약에서 기인하여 계약으로 그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이 또한 세계가 부여한 인연 중 하나. 이 '나'와 함께한다면 이 정도 권리는 주장해도 나쁠 것 것 없다 생각하는데."
녹주석만이 지닌 특별한 의미라 함은 영원한 젊음이자 총명, 행복, 그리고 통찰과 용맹. 폐신전에서의 첫 만남 당시 저에게 흥밋거리를 주어 마음에 들었다 판단한 이바라를 위해 자신이 부여한 최초의 축복이자 사랑. 부와 명예 그 무엇과도 관련이 없으되 오로지 계명을 이루는 것만을 원했던 당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바치려 했던 이바라는 그가 거두어가는 아쿠아마린이 아래로 추락하며 그린 궤적을 응시했다. 아쿠아마린은 바닷물에 닿는다면 녹아 없어져 버린다. 그렇기에 멍하니 뻗은 손으로 수면을 짚고, 더욱 팔을 내밀어 차갑기만 한 바닷물을 헤집어도 잡히는 것은 저를 지탱하기 위해 뻗어와서는 서로를 단단하게 얽는 새하얀 손가락 외에는 없었다.
"...이바라, 나는 가진 적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눈앞의 너를 잃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
나기사는 녹주석을 쫓다 균형을 잃을뻔한 이바라를 붙들다 내뱉어버린 말에 탄식을 흘렸다. 이바라 또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참을 뜸을 들였지만, 곧 그가 언급한 '가진 적 없는 것'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잃어버린 불멸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숨을 들이켰다. 자신은 멸망이 모조리 토벌되는 때에 맞춰 나기사에게 완전무결한 불멸을 선물하고 그를 완전히 해방시키고자 그를 속이면서까지 일을 벌여왔는데. 세계의 어디를 뒤지더라도 발견하지 못할 최고의 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힐난했던 과거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판단을 하였는데. 물을 먹은 천이 목울대를 감싼 듯 입을 열어도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아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두어 번 뻐끔거린 이바라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두려웠다. 한순간의 오만으로 불멸의 세월을 방관할 신이자 절대자를 필멸자의 시선으로, 바닥을 기는 뱀의 눈높이로 끌어내려 그 스스로 영생의 영광을 포기하게 한 스스로의 과오가 뒤늦게 풍랑을 일으켜 스스로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곳에 숨겨두었던 초라한 나룻배를 뒤흔들었다.
"아."
또한 그와 동시에 자신이 밝힌 뜻을 따라 뒤늦게 자각되기 시작한 감정을 깨닫고서, 나기사가 서서히 풍랑을 일으키는 격정 어린 파도를 불러 모았다. 멀리서 위험하다 소리치는 몇 인간의 외침이 들려왔다. 개중에는 이곳으로 달려들기 위해 정원을 주파하던 중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바람이 마주 불어와 접근을 포기하는 자들도 있었다. 오로지 나기사와 이바라만이 폭풍의 눈에 요람을 틀어 안착한 듯, 서로의 고동과 당황으로 범벅되어 달아오른 숨소리 외에는 무엇도 들려오지 않는 비좁은 바다에 주저앉아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어딘가 불편한 듯 붙잡힌 손을 빼내려 하는 이바라가 손가락을 꿈틀거렸지만 그런 사소한 반항 정도는 가볍게 무시한 나기사가 복잡한 시선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오래전 연회장의 테라스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떠오르고 말았다. 너의 말과 행동이 품은 뜻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너에 대한 것들이 궁금하다.
"...너를."
아니, 이바라 너라면 이런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기피할 것이다. 입 밖으로 새어나가기 시작한 제멋대로의 생각이 함부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다급히 말을 끊어낸 나기사가 경직되어 있는 이바라를 끌어당겨 그를 안아주며 아주 느리게, 그의 호흡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바꾸어 꾸며낸 단어로 시작되는 말을 이었다.
"너의 욕망을 사랑해.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하여, 아부하되 주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세계에 살아남은 너의 모든 것이니까."
" ─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토록 바라셨던 불멸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5년이라는 시간을 저와 같은 최악의 인간과 보내신 의미를 허투루 …… ."
나기사가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면, 이바라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말을 끊어내었다. 이런 미약한 자기혐오와 뒤틀린 일말의 후회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음에 안심하고서야 품을 수 있는 후회가 아이러니하게도 안심으로 변하는 것이 지독하게 생경하여 혼란스러웠다. 여느 날의 자신을 붙들었던 팔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너의 나약한 마음을 알고 있기에 한 선택이노라 속삭이는 말이 없었더라면. 이바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나며 당신은 그 스스로인 멸망을 초주검으로 몰고 간 것으로도 이미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소리칠 뻔했다. 그는 제게 자신을 휘둘러도 좋다는 확언을, 증거를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감히 불멸을 포기하려 하는 당신에게 무엇을 보여야 하지? 고작해야 황제의 시선으로부터 당신을 빼내기 위해 가소롭게도 당신을 업무보다 등한시하려 했던 나는?
"각하."
"이바라."
"저는 … "
"너는 이미 충분히 나를 보필했어."
내가 네게 주었던 것. 그러니까, 네가 보인 것과, 그에 내가 느낀 것의 이름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바라가 저택의 가장 큰 방을 내어주어 만들었던 서재에서 흥미롭게 접했고 또 그만큼 셀 수도 없이 많이 읽었던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기도 했다. 가장 고귀한 자에게도 있으되 가장 낮은 곳에서 숨을 죽인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존재하는 것. 자신의 말을 그저 말 그대로의 이별로 받아들인 듯 경직해 굳어가는 이바라의 등을 한 손으로 짓누른 나기사가 그의 어깨에 기대었던 이마를 떼어내며 서서히 몸을 물렸다. 극히 일부에 불과한 시간으로 자신을 모조리 물들여버린 감정은 그 변덕처럼 재빠르게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버린다. 나기사는 상대가 이바라이기에 제대로 묻지 못할 말을 스스로 삼켜버렸다. 사랑. 내가 네게 주었던 애정과 흥미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박애가 아니라 이바라라는 자에게 한정적으로 헌정되었던 애욕이었다.
"제가 부족한 판단을 해서, 당신의 조언을 듣지 않아서, 그래서, 잠깐 파도에 휩쓸리듯 충동적으로 생각하셨을 뿐입니다. 각하. 충동적인 면모는 제가 …… 아니, 대체 제가 무엇을 해야, 고쳐야, 제 말을 들어주실 겁니까."
"...아주 조금 불편해지는 것일 뿐이야."
내가 네게 주는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자 내게 남는 건 단 하나의 의문.
"보다 더 네가 내게 봉사하면 그것으로 메꾸어지는, 극미한 균열. 그래. 그렇게 정의하는 걸로 하자, 이바라."
네가 다른 존재에게 주는 사랑은 어떤 형태의 것일까. 그 말과 함께, 초조와 당황이 뒤섞여 혼탁한 잿물이 되어버린 감정을 숨겨 묻듯 거칠게 밀려온 거대한 파도가 심연의 기복에 요동치는 수면을 덮었다. 자신들을 중심으로 퍼졌던 파도의 격정이 점차 잦아듦은 소리 없는 이바라의 대답에 대한 나기사의 반응. 어째서 나기사가 자신의 권리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는가에 대해 뒤늦게 이해한 이바라가 저를 짚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겨 나기사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혼란하여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애초에 너희의 운명은 그런 충동으로 시작되지 않았냐며 심연의 기저가 물었다. 그리고 이바라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곁에서 지켜보았던 나기사는 그런 그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극미한 균열을 보고도 바위를 깨뜨리는 극미량의 물처럼 평온한 낯으로 틈을 파고들 뿐이었다. ...불멸을 잃은 내가 가치를 증명할 수 있도록, 네가 곁에서 소원을 속삭이며 지켜봐줘. 그것으로도 너를 얻은 나는 충분하여,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는 것으로 완벽해질 수 있으니까. 그리 속삭이는 말에 무슨 정신으로 내놓았을지 모를 대답조차 포말이 이는 격정 어린 파도에 묻혀 속절없이 흩어질 뿐이었다.
옛날 옛적의 용은 완전했다. 양립할 수 없는 불가해의 것. 한때 그리 불린 용은 마치 그 오만을 심판받기라도 하듯 단 하나의 계명으로 하여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한 것, 고요히 흐르는 모래와 같이 운명의 물길에 묶인 존재가 되었다.
이번 해의 여름이 평범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리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곤 했던 일이었다. 애초에 수일 간의 헤맴 정도는 각오했기에 오히려 불만 따위나 투정 어린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만 그 진상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직접 목도하게 된 까닭일지, 일전까지만 하더라도 비상하게 돌아가며 제 기능을 했던 머리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여느 때의 버릇처럼 부관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자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스러진 미지의 문명이 남긴 흔적을 앞둔 야만인처럼 사고 판단을 거치지 않은 시각적인 감상평만이 떠올랐다고 해야 할까.
"아아, 참으로 곤란합니다 … ."
심지어 오판으로 단정 짓기에도 한참 늦지 않았나.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그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바쁜 이성과는 달리 착실히 움직인 손이 재빠르게 지도를 갈무리하고서 품을 열었다. 평온하게 흩날리는 부슬비에 지도 위의 기록이 지워지지 않도록 겉옷을 단단히 여민 이바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득한 하늘을 뒤덮는 것은 새까만 운무. 먼발치에서 고개를 숙여 풀을 뜯는 말의 투레질에도 움직일 줄 모르는 시선이 자신을 짙은 색으로 물들일 기세로 흩날리는 부슬비를 마주했다.
'아직 제국의 안전이 온전히 보장된 것도 아니니까요. 생환자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의도적인 연출이었습니다만.'
우거진 수림 탓에 한 치 앞의 거리에 정말 숨겨진 건축물─그것도 이렇게 거대한─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까닭에, 이바라는 한쪽 눈살을 찌푸린 채 어깨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지도에는 표기되었으나 인적이라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지역. 산맥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물길은 과연 고서의 낱장에 적힌 두어 단어로나 '신벌과 신의 영역'이라는 이명을 얻을 법한 외양을 갖춘 채 수해를 관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탄에 가까운 감상은 거기서 그치기로 한 이바라는 여전히 등 뒤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을 흘겼다.
자신을 이곳으로 향하게 한 것은 황제의 밀지를 전달하는 연락책으로서 수년간 비밀리에 활동했던 부관의 부추김이었다. 깊게 고려하지 않아도 부관의 들뜬 목소리는 곧 황제의 명령이 한 번 여과된 말이 되었다. 정은 없었지만 전장을 구른 경험 탓에 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던 자를 홀라당 잡아먹은 황제의 낯짝에 침이라도 뱉어보고 싶다는 아주 불경한 생각은 잠깐의 일탈을 즐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분명 제게 들어줄 소원이 하나 있지 않느냐 했었죠. 은밀히 신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안일하게 넘길 뻔했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에게 영토를 빼앗기기 시작한 이래로 들린 적 없던 최초의 승전보는 그럴싸한 음모론의 기반으로 변모되기 쉽다. 이를 우려한 제국의 주인이 충실한 번견을 잃을 것을 우려해 ─그렇다고 자신을 잃는 것에 진심으로 아쉬움을 표할 위인도 아니다만─ 같잖은 수작질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아, 잠깐. 정신이 흐트러지고 있는 듯하다. 배려라는 말조차 어불성설이지 않던가. 수도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자신조차 손에 쥐고서 애지중지 키워낸 병정을 통제 불가한 변수의 작용으로 인해 잃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데 제국을 이끄는 황제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속에 쥐고 있는 것이 자신과 같이 속이 너무나도 시커먼 나머지 이것의 나의 편인지, 아군의 탈을 쓴 간악한 짐승인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존재를 특정할 수조차 없는 것과의 전쟁을 이어가는 중에도 수도와 변방에 정보통을 심어둔 덕분에 늦지 않게 황제의 의도를 읽어낸 이바라는 숨을 내쉬며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았다. 부관이 몰래 전한 정보에 따르면 그의 고향에서도 연로한 자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구역이라 했던가. 찬사에 가까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에는 제국의 누구보다 더 혓바닥을 간사히 놀릴 자신이 있었음에도 그저 경탄의 침음으로 마무리 맺을 감상만이 그의 입가를 맴돌다 침묵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머릿속으로 지도의 여백이 그려진다. 어쩌면 이 패색 짙은 전쟁을 끝낼 수 있을 모종의 '단서'가 고작해야 몇 보 앞의 신전에 잠들어있다. 이바라는 검을 쥐고 혈액이 낭자한 전장을 누빌 때보다 더한 긴장감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걸음이 옮겨지는 것은 그를 재촉하듯 등 뒤에서 불어온 실바람이 멎은 뒤였다.
녹림만큼이나 짙은 고요였다. 세차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물길 위에 지어진 거대한 신전은 그것이 뒤집어쓴 누명 같은 괴소문의 기색이라고는 일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하고도 신비로웠다. 그래서였던가. 병사들과 귀족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라는 변명을 하긴 하였으나, 평소였더라면 귀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부관의 농담을 흘겨듣지 못한 까닭은 황제의 밀명뿐만 아니라 정말로 단순한 충동에 의한 선택이었다. 사실 실상을 깊이 따지고 본다면, 수년간 제대로 된 휴식조차 얻지 못하고 살육과 생존 투쟁에 절여진 두뇌가 드디어 항복을 선언해버린 탓에 제대로 된 계산과 판단조차 하지 않고서 몸을 움직이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옳았다만. 덕분에 무려 황제의 치하를 받기 위해 전장에서 돌아와 공을 인정받은 직후 수일을 달려야 했던 것을 떠올린 이바라가 한숨을 삼켰다. 자신의 안전을 위했다고 하지만 정말 미친 게 분명했다. 미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에 내몰린 것을 알기에 스스로 선택한 일이긴 하나, 정말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제국이 베풀듯 내어준 휴가를 소모하면서까지 이곳을 찾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그는 제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뭐, 실수를 한다면 더욱 많은 이득을 취하면 그만이긴 합니다.'
이렇게 비가 내릴 때마다 사람을 모방한 것이 나타나 정신을 홀린다, 라는 근거 없는 괴소문이 도는 지역에 과연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외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요소가 존재할 것인가. 뭐, 하긴. 멸망과의 전쟁에서 거대한 심판을 피한 직후라는 것을 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이라도 더 공을 차지하기 위해 교묘하고 간악한 술수가 난무하던 궁중 무도회에 비하면 천 배는 낫겠다만. 어느새 손에 쿠크리를 쥐고서 빙글빙글 검을 돌리던 이바라가 인상을 썼다. 그 눈치 빠른 빌어먹을 노인네들이 "하지만 사에구사 변경백은 서북지역의 전투에서 수백의 병사가 죽는 것을 보고도"로 시작되는 말로 운을 떼며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 낌새를 보인 것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랜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수도에서는 강력한 황권을 지켜낸 덕분에 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쪽이 지나치게 제국민의 민심을 사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한 황제파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는 ─실질적 권력은 황제가 독점하고 있으니 어불성설이긴 하다. 게다가 여전히 황제는 자신을 적당히 견제하며 이용만 할 뿐, 직접적인 부정의 움직임은 없지 않았다. 물론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있으니 늘 대비하고 있다만─ 적당히 몸을 사릴 시기였음에. 아. 정말이지. 멸망을 죽이고 사람이 도구로서 희생되는 전장보다 더 짙은 비린내가 진동하는 탁상공론의 현장을 머리에서 지워내듯 이바라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비가 그쳤다. 자신의 이성이 휘발될 듯 위협을 느낄 때마다 나타나는 방어기제처럼 변덕을 부리는 날씨에 이바라가 혀를 차고서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높게 자란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를 꿰뚫은 햇살이 드물게 운무 사이로 보였다.
'세상 일은 모르는 거라고는 합니다만 … .'
서류더미가 아니면 전장에서의 전투 외에는 관심을 가질 일말의 틈조차 없었던 자신의 삶에 이런 오지의 폐신전이라는, 진위 여부조차 가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에 대한 소문이 끼어들 것이라는 상상이라도 해보았던가. 결국 길어지려는 잡념을 접고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회전하던 쿠크리를 거둔 이바라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래 방치된 티가 만연했지만 그렇다고 무너진 곳은 없는 폐신전으로의 다리를 건너, 장엄하게 간격을 맞추어 서있는 기둥이 솟아있는 회랑을 지나, 새의 지저귐조차 없는 신비로의 전진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잡념을 지워내는 백색의 범람을 따라 흐르듯 움직이던 이바라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 지역을 적시던 부슬비가 정말 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마치 전장에서의 괴현상을 연상시키는군요. 이것 참, 폐하께서는 '단서'에 대해 여기까지 예상이라도 하신 건지?"
오직 신전만이 비의 영역에 둘러싸인 채 맑은 하늘을 유지하였다. 이바라가 마주한 신전의 중심은 고요하게 흐르는 모래 위로 발목까지 차오르는 맑은 물과 수많은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뿐이었다. 과연 사람을 홀릴 법한 소문의 근원지 답다는 평을 내린 이바라는 연못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입구에 걸터앉았다. 자.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소문의 비는 신전에 내릴 수 없고, 사람을 홀린다는 형상은 나타나지 않으니 황제 폐하가 명하신 '여름휴가'를 누리러 귀환할 것을 고려해야 …
"석 달 만이려나."
순식간에 제게 드리운 그림자에 반사적으로 쿠크리를 뽑아 겨눈 이바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예상하지 못한 것을 갑작스레 맞닥뜨린 것처럼 놀라움을 드러낸 눈동자가 길게 늘어져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담았다.
"누군가 나를 찾아낸다는 행위는 즐겁구나. 숨박질 같아."
"이쪽은 아예 처음이라, 당황스럽습니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석 달만'이라는 건? 아니, 그것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얼핏 수사슴의 것을 닮은 뿔이 돋아난 새하얀 사내가 살풋 웃었다. 이토록 기척이 없음에도 기습하지 않았기에 검을 아래로 내렸으나,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에 사내는 적갈색 눈을 곱게 접으며 상체를 낮추었다. 이바라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물결처럼 흐르듯 사락거리는 소리 없이 흐트러지는 옷을 보았다. 유심히 살피지 않아도 상대가 입고 있는 것은 제국이 멸망과의 전쟁에 맞닥뜨리기도 수백 년 전에 멸망에 의해 멸절되었더라는 동대륙의 복식이었다. 더구나 저렇게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종족에 대한 기록을 얼핏 본 기억이 있어, 이바라는 상대가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용(龍)이군요. 그제야 고서에서도 기록이 사라질 정도로 오래전부터 발길이 끊긴 폐신전에 대한 소문과 금역에 대한 이야기가 근래에 와서야 ─그렇게 봐도 수백 년이 넘었지만─ 다시금 고개를 내민 것인지 이해한 이바라가 천천히 이쪽으로 내밀어지는 손가락을 응시했다.
흉터나 굳은살 따위는 볼 수 없는 창백한 손이 쿠크리를 두드렸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속으로 자신의 정체를 유추한 것을 알아 차라기라도 한 듯 상대는 그저 날이 서지 않은 부분을 한 번 두드리고는, 다시 상체를 일으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바라가 당신이 한 행위에 무슨 뜻이 있느냐 묻고, 제멋대로 추론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손가락 위로 차가운 것이 스쳐가는 감각에 고개를 들고서 시선만 아래로 떨군 이바라가 침음했다.
"이런.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당신만큼이나 엄청난 거물이 보잘것없는 제게 접근한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이유?"
"용건 말입니다."
순식간에 신전의 연못을 채우고 있는 것과 같은 물이 되어 바닥으로 쏟아져 버린 쿠크리의 칼날을 흘긴 이바라가 조용히 손잡이만 남은 검을 내려놓았다.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퍼져나가는 파장과 고요한 낯을 번갈아 응시한 이바라는 결국 통성명을 하듯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힐 수밖에 없었다. 실은 '휴가를 즐기러 나온 서대륙의 귀족이 먼저 정체를 밝혔으니 불청객인 당신도 정체를 실토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의도가 다분했다만, 그런 눈에 선한 어투에도 느긋하게 물살을 짓이긴 상대는 이쪽의 이름을 두어 번 되뇔 뿐이었다. 말을 내뱉는 자의 의도와 권력에 의한 것일 뿐, 언어 그 자체에 힘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던 이바라조차 섬찟한 기분이 들어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깜빡일 수밖에 없을 시원한 기류가 신전을 감싸 안았다.
다행스럽게도 상대의 이름을 듣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란 나기사. 과거에는 서대륙과 동대륙이 연결되어 있어 언어와 이름 모두 하나의 뿌리에 있었음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을 이름이었다. 나기사가 밟고 있는 수면 아래로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는 흰모래를 흘긴 이바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저자는 참으로 이 신전의 모든 것과 어울리는 사내다.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통성명을 하고 적당히 눈을 피해 이 신전과 관련된 비밀 따위를 알아내려 했던 차에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눈을 마주하니,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버린 이바라가 정말 저에게 용건이 없느냐 퉁명스레 물었다. 나기사가 일으킨 것인지 모를 기척이 신전 이곳저곳에서 날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손을 가만히 두며 대화를 이끌어나가기에는 지나친 번거로움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용은 필멸의 한 가닥. 용에게는 무구한 자들을 짓밟을 수 있을 오만을 겨냥한 최초의 언약이자 족쇄가 있다."
"왠지, 꽤 심오한 뜻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이렇게 저에게 무언가를 밝히심은 함정이 아니길 바랍니다. 아직 모시는 자가 있는 몸인지라 조심해야 할 것이 많거든요."
어째서인지 안압이 차오르는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죽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라 하는 말에 움직임을 멈춘 나기사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였다. 인간은 제 야망이 인식 밖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것을 원동으로 삼고서 살아간다. 한 번의 실패가 있었기에 잠깐의 뜸을 들인 나기사는 그림자에 가려 파리해진 안색을 한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바라와 눈을 마주했다.
"용이 완전무결한 불멸로 세상에 남기 위한 계명은 단 하나.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자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가치를 인정받을 것."
"그러니까 일종의 자기 증명이군요."
"...돈과 명예, 누군가의 애정과 죽음. 그 무엇이든 상관없어."
"누군가가 신전에서 당신을 발견하길 기다리심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장소를 기피하는 것과 동시에 말의 신뢰성을 높이는 전략입니까? 이거, 놀랍습니다. 게다가 이쪽의 이익을 보장하는 계약이니 누구든 혹할 수밖에요. 탁월한 계책입니다!"
"...그래? 그런 칭찬은 처음이라, 어쩐지 기쁘네."
표현으로는 기쁘다 하였지만 여전히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있는 나기사의 낯을 흘긴 이바라가 숨을 들이켰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역시나 상대는 감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류다. 원초적인 기쁨과 쾌락에는 확실할 것 같다만. 그나저나 정말 칭찬의 뜻으로 받아들인 겁니까, 지금. 혓바닥 곳곳에 기름칠을 했다 해도 쉽게 수긍하고 넘어갈 법한 승냥이들을 상대하다 이렇게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순진무구한 존재를 마주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답답함에 내몰린 나머지 고개를 내저을 뻔했다. 무엇을 해도 의도대로 일이 곱게 마무리된 적이 없어 당장의 상황은 익숙했지만 이바라는 가만히 있음에도 존재감 가득한 자를 슬쩍 바라보며 머릿속을 뒤덮었던 '평소'라는 단어를 지워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위로 새로운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덮어쓴 이바라는 그제야 목 언저리를 맴돌았던 의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귀중한 보물을 그 누구도 쟁취하지 않았음에 되려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쟁취할 물건도, 누군가의 승전보에 흔들릴 깃발도 아니니까."
"그게 아니라 …… . 으음. 십중팔구 함정이라 생각한다고요. 당신 정도나 되는 존재가 어째서 진작에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완벽한 병정, 실례, 용이 되지 않으셨나. 하고 말입니다."
"어째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나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적인 박애주의로나 설명이 될 법한 순진한 질문에 말문이 막힌 이바라가 눈가를 두드렸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이 세상에 태어나고도 수십 세기를 거뜬히 살았을 존재의 지적 수준에 실망보다는 되려 호기심이 생겼다. 저자의 진짜 기저에는 어떤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까. 정말 저 반응이 계획된 거짓이 아니라면 나기사가 한 제안은 다시는 없을 천혜가 될 것이고, 비록 그가 꾸며낸 말로 자신을 혹하게 할 타락한 용이라도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계약을 얻어내면 된다. 그래, 잠재적 위험에 겁을 먹고 포기하기엔 보장되는 이익의 범주가 생각보다 컸다. 고민에 빠진 이바라가 집요한 시선으로 나기사의 이곳저곳을 훑었다. 생김새부터 분위기까지 은은한 위압감이 있으며, 오랜 전쟁으로 인해 더욱 폐쇄적으로 변한 귀족 사회에 밀어 넣더라도 여타 영식에게 밀리지 않을 외양은 틀림없이 가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기사 스스로가 자신은 쟁탈하여 거머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했지만 일방적인 이익으로 맺어진 상하관계에서 자신이 의도한 대로 계약을 성사시킨다면, 분명 그는 완벽한 자신만의 무기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에 용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일말의 정보를 주었을 황제가, 도저히 단단히 돌아있지 않고서야 전장에서 뛰놀던 자신을 무리하면서까지 꺼내 밀어 넣으며 어떤 언질도 하지 않았음은 정보의 유무에서 벌써 우위가 정해졌음을 뜻했다. 살아남기 위해 소년기부터 모셔왔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는 용의 존재를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무렵에 비로소 지금 상황이 가져다줄 미래의 불확정적인 이익의 크기를 계산해낸 이바라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단은 저쪽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어야겠다. 가지지 못할 것이 없어 상실과 죽음을 향해 끝없는 투쟁을 일삼는 인간을 이해하지 않는 오만에 처음으로 획을 그어, 자신의 화폭의 틀에 그를 잡아두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전장에서 전사자의 쓸만한 유품을 발굴해 내는 것조차 그렇게 자주 주어지는 행운이 아닙니다, 이 세계는."
"...전장. 맞아. 인간의 전쟁은 끝맺음과 거리가 멀지. 어리석게도."
...인간은 투쟁하는 것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종족. 동대륙의 멸망 이후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약한 너희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신을 회수하는 행위는 그들의 기여와 업적을 기리기 위함인가? 영혼과 공명하여 안식을 기도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의 죽음이라 그저 흩어질 뿐인데. 아아. 이해하기 힘들군. ...역시, 인간은 어렵구나.
제 말을 따라 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 바닥을 짚었다. 용이란, 역시 운 따위에 매달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갈망하는 요소에 대한 성취조차 기적이 되는 세상에 당신이나 되는 존재와 계약하는 것만큼의 행운이 있을 리가. 그런 기본적인 갈망조차 느껴본 적 없을 고고한 그와 눈을 마주한 이바라가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라앉히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발치까지 차오른 물에 파문이 인 것도 그때였다. 제 근원이 되는 동대륙의 멸망 또한 그 '멸망'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었란 사실을 알면서도 나기사는 이바라가 입에 올린 전장이라는 단어에 생소함을 느끼는 듯했다. 초월적인 잠재력 탓에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하였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이바라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참극을 지워내며 옷무새를 가다듬었다.
"제 포부를 밝힘과 동시에 당신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시 제대로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당신의 시간을 할애해도 되겠습니까?"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손뼉을 친 이바라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수긍한다면 당신을 철저히 이용해 주리라. 그리 말하는 눈빛을 일부러 지워내지 않은 이바라의 낯을 빤히 응시한 나기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바라는 새삼스레 구두로 하는 계약은 낯설다 생각하며 허전함을 느끼는 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동대륙의 용에게 제국식 예를 표하는 게 걸리긴 했다만 상대가 마치 '나의 시간은 유한하나 무한에 가까우니, 너의 언변을 감상한다고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에 의미 없는 고민은 빠르게 휘발되었다.
"저는 서대륙의 제국에 충성을 바친 사에구사 가문을 이끄는 사에구사 이바라라고 합니다. 아, 일곱 개의 씨앗이라고 쓰는데 의미는 없습니다."
"...나는 란 나기사. 새삼스럽지만 용이라 불리었어."
"제 소개 또한 어디까지나 공적인 부분입니다만, 그건 이야기가 길어지니 생략하도록 하죠. 식별기호에 불과한 것에 곧 불멸자가 되실 당신을 종속시켜선, 이 사에구사 이바라의 머리로도 마땅한 전술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곧, 불멸자?"
옆으로 기울어지는 고개를 따라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계약의 성사를 앞두고 있다는 희열보다는 진중한 분위기 속의 떨림에 압도되어 경직된 손가락 끝을 가린 이바라가 당신이 들은 게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 나기사, 위대한 동대륙의 용.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제안이라기보다는 상호 이익이 되는 거래에 가깝지 않나."
"다만, 제가 당신에게 계약을 제시한 것으로 하죠."
저에게는 의미를 변질시키는 부류의 제안이 아니니 그러라 말한 나기사가 이바라를 내려다보았다. 홀로 맑은 창천에 찬란히 으스러지는 햇빛이 이슬처럼 맺힌, 벽옥 같은 한 쌍의 뿔이 그림자를 내린다. 아무래도 저걸 숨겨달라 부탁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용의 상징을 숨길 수는 있는 건가? 다소 진지한 고민이 떠오름과 동시에 번들거리는 푸른 눈을 들여다본 나기사가 살풋 웃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지만 그의 철릭을 닮은 두루마기가 흩날렸다. 물기 짙은 공기가 얼굴을 두드리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이바라는 숨을 들이켜며 눈가를 훑었다. 당연히 투명한 물일 것이라 여긴 액체가 오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음에 할 말을 잃은 이바라는 어쩐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기사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말을 이었다.
"당신을 온전히 숨기는 방법도 있겠지만 … 보기엔 남루할지 몰라도 주시자가 많은지라."
턱을 매만지며 하는 말에 잠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한 나기사가 이바라를 불렀다. 이에 지금 당신과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무엇이 불편하셨느냐는 듯 얼핏 보면 불경할 눈빛을 한 이바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하얀 손가락이 위를 가리킨다. 뭡니까, 이 표현은. 아무리 전략적으로 자신을 깎아내렸다고 하지만 그런 단순한 속임수에 당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만. 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나기사가 다시 한번 더 손을 움직여 제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시선이 위로 올라가자 적갈색 눈이 곱게 휘었다. 아, 하는 탄식은 너무 옅은 나머지 작게 웃는 목소리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정확하게는 이바라의 눈에 밟혔던 나기사의 뿔이 소리 없이 사라진 것이지만.
"제국의 중추가 당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런 형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제법 중의적인 뜻을 내포하는 듯한 말에 시선마저 묘하게 빗나가자 나기사가 산뜻하게 이바라의 제안을 수락했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낯선 상황의 것을 겸연쩍게 여기는 것 또한 인간의 특징일까. 물론 순수하다 평가하여 힘을 빌려주는 순간 그들의 낯은 반전되어 가장 추악하고 실망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욕심을 앞세우기보단 조심성 있게 자신의 안위부터 챙기려는 반응은 드물었던 까닭에 흥미가 동하여, 나기사는 일말의 기대를 걸듯 혈색이 도는 낯으로 미소를 가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사에구사 이바라, 너의 소원을 들을 차례야."
"무례한 저의 부탁을 듣고서도 저를 해치지 않으시겠다 약속하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신지?"
"...자비라고 할 것도 없다만."
"아, 이왕이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항목도 추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저의 단어 선택이 당신의 기준에 들어맞습니까?"
단편의 소설처럼 짧기만 한 대화가 오가고 나서야 비로소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낸 나기사가 하늘을 향해 한쪽 손을 펼친 채 팔을 뻗었다.
"...후후. 이바라는 흥미로우니까."
좋아. 그렇게 속삭인 목소리가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하는 신전의 물을 따라 덧없이 흩어졌다. 서대륙도, 동대륙도 아닌 미지의 출처에서 비롯된 언어가 수면을 타고 흘러와 그의 발목을 감싸는 것을 흘긴 이바라가 숨을 죽였다. 청명함을 넘어선 투명한 물길이 활을 타고 흐르는 선율처럼 아름다운 운율로 움직였다. 절경. 태양조차 감히 똑바로 비추지 못하는 자를 중심에 두고 빗기어 내려오는 햇살마저 그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장신구에 불과하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각막을 쪼듯 따갑게 반사되는 빛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이바라가 흐트러짐 없이 뻗은 나기사의 손 위로 모여드는 기류를 바라보았다. 전조 없이 불려온 힘이라고 하더라도 버티지 못하는 것인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서늘한 감각에 주먹을 말아 쥔 이바라는 자신을 잊은 것처럼 온전히 손바닥 위의 무언가에게 시선을 모두 할애한 나기사를 응시했다. 생각을 읽어낸 것처럼 순식간에 지워낸 뿔이 마치 설산 위의 단 한 그루 나무처럼 아스라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도 그때였다.
흥분으로 뛰기 시작한 가슴이 혈류는 뿜어내는 박동에 맞춰 공명하던 힘의 흐름이 일순간 멎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새의 지저귐이 멎은 까닭에 찾아왔던 고요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적이 그들이 존재하는 신전을 뒤덮었다. 하등한 인간 따위에게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듯 손 위에 모인 거센 파도에게 건네는 나기사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그가 유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변화는 나기사의 발목에 걸려있던 푸른 언어가 겉옷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한차례 맴도는 것. 무형의 힘이었던 격랑이 가라앉자 나타나는 푸른 보석에 경외감과 호기심이 생겨난 이바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잠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에 대해 회의감이 들긴 하였으나 그마저도 나기사가 이쪽을 바라보며 모조리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가 다가왔다. 처음의 모습을 재현하듯 날카롭게 일렁거리는 수면을 밟으며, 그가 짓밟고 있는 물에 발목이 잠겨버린 자신에게로.
"이건 …… ."
"녹주석綠柱石이야."
"아쿠아마린이군요."
손을 내미는 나기사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 챙기게 된 이바라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것을 왜 저에게? 그리 묻는 듯한 눈빛에 눈을 가늘게 뜬 나기사가 고개를 기울여 제 목덜미를 가리켰다. 아까의 의식과 너에게 건네어준 보석. 네가 바란 것을 이루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네게서 소원을 얻어내고 불멸로의 오랜 꿈을 이루어낼 차례. 가늘어진 눈이 그대로 휘어지며 짓는 미소에 이바라는 아무 말 없이 손바닥 위의 보석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정도 채도의 아쿠아마린은 저조차 본 적 없는 희귀품. 거래를 위해 주고받는 뇌물이라고 하기에는 힘의 격차가 명백합니다만. 점점 복잡 미묘해지는 심정에 제멋대로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의식하여 눈을 크게 뜬 이바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소리 없는 질문을 던져도 마치 알아서 깨달으라는 듯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탓에, 한참이 지나서야 제멋대로 판단을 해버리고 이 의미 없는 소모전을 끝내리라 마음먹은 이바라가 아쿠아마린을 거머쥐었다.
이윽고 그는 뻔뻔하게 변한 낯을 들어 나기사를 마주했다. 그는 정말 돈과 명예, 누군가의 사랑과 죽음 그 무엇을 빌더라도 단번에 이루어줄 것이다. 새삼스럽게 여태 그를 만난 자들 중에서 용케도 황제의 죽음을 빈 자가 없음에 홀로 경탄한 이바라는 파문 한 번 일지 않는 고요한 눈을 마주하고서 '아니면 저처럼 안전을 보장받지 않아 죽임당했거나요' 따위의 시답잖은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그 어떤 해를 가하지 않겠다 약속받았으며,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말하는 속삭임을 들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로 둘도 없을 보석을 받았다. 그러니 감히 '건방진' 소원을 떠올려 목울대를 지나 입까지 올린 이바라는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 자신의 소원을 빌었다.
"그렇다면 당신을 택하겠습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믿기에, 상대가 누구라도 단 한편의 영역만 내어준다면 그와의 관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긴 오만과 자신감으로 그리 말했다.
"저는 서대륙의 대제국에 소속되어, 평화를 위해 전쟁에 대비하는 자. 언젠가 소모될 물질적인 것보다야 그 존재로 가치가 있는 용인 당신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기사가 숨을 멈추었다. 처음으로 내보인 직설적인 당혹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는 이바라의 소원을 두고 고민에 빠진 듯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이다. 파충류의 동공이 설핏 나타났다 사라지는 눈동자에 자신이 온전히 담기기도 전에 빠르게 흐름을 가져온 이바라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런. 제가 감히 무슨 실수라도?"
"...솔직히, 그런 선택지가 있었는지 몰라서 당황스러워."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는 나기사 님께서 하신 말씀의 범주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찾아냈습니다. 생이 유한하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얻어낸 인간의 잔꾀란 서로에게도 치명적인 독이 되니까요."
"너는 똑똑하니까, 뭔가 새로운 것을 요구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 밖인걸. ...누군가에게 당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 물질세계의 모든 것은 독입니다. 오로지 그 용량과 목적을 좌우하는 자의 판단으로 누군가를 해할 독극물이 되지요. 물론 당신을 그따위 독으로 소모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점차 비구름이 영역을 넘어와 신전 위의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들어올 땐 부슬비였던 것이 이제는 가랑비가 되어 어깨를 적셨다. 이바라는 서서히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자신과는 달리 여전히 수면을 밟고서 메말라있는 나기사의 반응을 살폈다. 일생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도박이 통했다는 걸 알면서도 목이 탔다. 그가 한 번 약조한 이상 자신의 소원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하는 어깨 위로 가중되는 것이 그를 다루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아닌 그저 제복의 무게라 치부하며.
"...인류의 모든 행위는 어렵기만 해."
"아무래도 그렇죠. 더구나, 인간이 그저 쉽기만 한 존재였다면 애당초 저 따위가 살아남아 당신을 마주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중에도, 그들은 학습하고 진화하고 있어. 그저 실망하게 만들었던 군중 속에서 너와 같은 돌연변이가 나타는 것조차 ...나의 예상 밖의 일이야."
"그렇다면 그런 제가 당신을 섬길 테니, 당신은 저를 통솔하십시오. 제가 거머쥐고자 하는 소원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 정말 예상외의 사건이었다. 저를 달라는 소원을 빌었음에도 자진하여 섬김을 맹세하고 이쪽이 통솔하기를 바라는 존재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나 있었던가. 이바라의 존재는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과거의 기억조차 없어 마치 최초의 그릇된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당했을 때의 충격을 닮은 흥미가 전신을 돌게끔 했다. 자신에게 소원을 빌어왔던 인간들을 떠올린 듯 말을 덧붙이려던 나기사는 점차 무언가로 물들어가는 이바라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물의 흐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모래와 같습니다."
여름의 더위에 지친 기색을 한 행인들이 즐비한 중심 구역. 생존 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전쟁의 유무조차 모르는 듯한 수도의 거리를 흘긴 이바라가 찻잔 손잡이를 짓누르던 엄지를 떼어내며 말했다. 그 어떤 새도 닿지 못하는 응접실에서 편히 말씀하셔도 될 일을 무려 잠행이나 나서서는 그 어떤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또 한 번 자신의 것을 탐내려 하는 절대권력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해낸 이바라는 소란스러운 일상에 잠식된 거리에 한 번, 그리고 차갑게 식어있어 희미한 수증기조차 나지 않는 상대의 잔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자신조차 혀를 내두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길고도 긴 무언의 압박이 어연 한 시간하고도 수십 분 째. 황궁에서 친히 마련한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한 이바라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운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불순물을 깎아내지 않은 원석이 제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존재를 과시할 수는 있으나 거기서 그치게 되는 것이지요."
말을 이어가던 중, 있지도 않은 부상을 핑계로 나기사를 저택에 두고 온 것을 천운으로 여긴 이바라가 차를 머금었다. 아. 이 향은. 발레리안 루트라고 했던가요. 신경 완화와 수면장애 개선 … 한 시간 이내에 잠들었을 때 도움이 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어느새 기척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상대의 앞에 새로운 잔을 가져다 두는 남자를 흘겨본 이바라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다과가 준비된 테이블의 겉만 투박한 제과류를 응시했다. 황금으로 테를 두른 장식 위에 두어 개만 놓인 오트밀 쿠키는 얼핏 보았을 때 푸대접을 받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르나, 먼저 내어진 차와의 합은 나쁘지 않도록 준비된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황궁까지의 거리는 한 시간 내외였으므로, 이 지겹고도 긴장되는 만남과 대화가 곧 종결되리라 예상한 이바라가 받침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리 명검이라 하더라도 날이 서지 않았다면 전장에서 쓰일 수 없는 장신구에 불과합니다."
진심으로 충언을 바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잘도 아쉬운 말을 조잘거리는 낯짝에 닿은 시선은 그저 무감했다. 전장에서 보인 나기사의 압도적인 무력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었음에도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바라의 말에 반론을 표하지 않은 남자는 여전히 하나도 줄어있지 않은 다과에 손을 뻗었다. 나기사가 그러하였듯이, 의도하지 않아도 품위가 묻어나는 우아한 손짓으로 제게 주어진 쿠키를 하나 앗아가는 상대의 손가락을 따라 흐른 눈길이 보기 좋게 휘는 미소 아래로 사라졌다. 통하지도 않을 변명은 겉으로 드러낼 구실 정도의 선에서 용인되었다.
"불초, 이 사에구사 이바라에게 그런 인재를 맡기기 불안하심은 이해하나 안일한 마음으로 이미 그와 마법으로 계약을 채결한 내용이 있으니 폐하께 재능 있는 병사를 바치지 못함이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 …… 아무래도 새로운 쿠키를 내어와야 할 것 같군. 지난 승리와 조사에 대한 보상은 이것으로 하지."
가보아도 좋다는 허락이 없었음에도 지금이 물러날 때라는 것을 직감한 이바라가 예를 표했다. 하나의 이익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상실이 따라옵니다. 존재하는 것이 오만으로 규정되어 땅에 떨어진 용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오만으로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였으며, 아쉬울 것 없는 제국의 주인은 인간으로서의 오만이 있기에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고작 쿠키 하나 따위로 자비를 베풀었군요. 이바라는 속으로 생각하는 말이 불경하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바깥에서의 허례허식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치 이곳이 알현실이라도 된 것처럼 등을 보이지 않고서, 천천히 이어나가는 발걸음으로 숨을 죽여 서서히 상대가 장악한 공간에서 스스로를 지워나갔다. 속이 들여다 보이는 허울뿐인 미소를 지워낸 낯을 한 채. 승냥이 같은 작자들을 상대하러 가는 행위가 그리 싫지 않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만 같다, 라고 생각하며.
"안녕하십니까! 모두 이렇게 일찍 모이셨을 줄이야!"
각양각색으로 일그러지는 낯을 음미하듯 경쾌한 인사를 올린 이바라가 걸음을 옮겨 제게 안배된 의자로 향했다. 가장 경계하고 있던 황제의 암묵적인 허가를 얻어냈으니, 큰 뜻을 도모하면서도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는 승냥이들을 상대할 준비를 끝낸 이바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귀족 회의 중 단 한 번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흘러가는 회의. 실질적인 이득이라고는 단 한 줌도 얻어낼 수 없는 탁상공론의 현장. 전형적인 귀족의 귀감들의 모임에 홀로 던져진 이바라가 제게 주어진 서류를 훑어보았다. 가장 안전한 땅에 모여 말로만 전투를 치르는 작자들에게도 어찌어찌 알현 소식이 전해진 모양인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혀로 겨루는 경합 중에도 나기사에 대한 언급은 일절 들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도 나기사의 존재를 감히 넘볼 수 없도록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는데. 참으로 아쉬운 노릇이었다.
연회가 성황리에 열린 틈을 타 테라스로 빠져나온 이바라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돌렸다. 혀끝이 둘로 갈라졌다는 평판은 고사하고 일부를 빼앗겼다고는 하나 차마 무시할 수 없는 공을 세운 까닭에 접근해오는 자들이 있어, 저마다 적당한 대답을 해주며 상대하느라 진이 빠질 노릇이었다. 물론 일평생을 사람과 멸망을 상대하는 데 소모했던 탓에 고작 그런 행위로 탈력될 수준은 아니었지만, 원로회가 참석한 귀족 회의를 이어 연회까지 수 시간을 소모하는 중에도 떠오르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각하를 더욱 안전한 방법으로 쟁취해낼 방법을 모색하는 것뿐이었으니. 섣불리 나기사의 이름과 호칭, 하물며 묘사마저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도록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한 까닭이었다. 이처럼 과거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 아닌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과연 그에게 물질적인 것을 바라지 않고 삶을 떠안은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가에 대해 짧은 고찰을 하곤 했기에, 이바라는 여느 때의 습관처럼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적당히 시원한 날씨와 어우러지는 산들바람이 불어옴에 시종이 권하였던 와인을 건네받을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던 차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연회장의 음악마저 차단하는 암막이 인위적으로 흔들리는 기척에 난간을 짚은 손을 떼어낸 이바라가 미소를 자아내며 뒤를 돌았다.
"이런 이런. 적절히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언질을 해두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심기가 편치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이미지에 걸맞게 제작 의뢰를 넣었던 셔츠를 입고서 커튼 앞에 서있는 나기사와 정확히 눈을 맞춘 이바라는 곧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짐에 주변을 훑었다. 반투명한 막이 벌집무늬를 따라 하듯 테라스를 집어삼키고 나서야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은 마법의 산물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여 감히 나기사 앞에서 검을 빼들고 주변을 경계하곤 했지만, 이제는 이것이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마법의 일종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을 밟고 다가오는 뚜렷한 발걸음 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걱정이란 제가 받을 리 없는 감정이므로, 표정에 눈에 띄는 균열은 없었으나 한 번의 전쟁과 두 번의 휴식기 동안 나기사의 행동 양식 대부분을 학습해낸 이바라는 그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 '불만'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단어를 택했다. 곧 의문을 표해내는 적갈빛 눈동자가 테라스 아래로 펼쳐진 정원의 붉은 불빛을 머금었다.
"갑자기 나타나면 놀랄 줄 알았어. 초엽의 이바라는 그랬으니까."
"각하. 다음에는 조금 더 색다른 방법을 채택하신다면, 이 사에구사 이바라가 각하의 마음에 드는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더라도 그 위용스러운 재능에 자연히 경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후후. 이바라의 그 간살은 늘 새롭기만 해. 음. 이런 반응도 좋으니까. 만족하도록 할까."
각하가 제 아첨 방식에 낯섦을 느끼시는 것처럼 저도 도저히 그 거대한 단위의 표현은 적응하기 힘듭니다만 …… . 뭐, 제가 적응해나가면 되는 일이니까요. 자각하지는 않았던 긴장의 끈을 내심 풀어헤친 이바라가 제 코앞까지 다가온 나기사의 목 아래로 손을 뻗었다.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굽혀진 팔을 타고 올라가는 시선이 장갑으로 덮인 제 손에 닿았다. 손목을 붙잡히는 것에 거부감이 상당한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인지 허공에 멈추어있는 나기사의 손이 이쪽으로 뻗어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이마저도 부담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삼켜버린 이바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고는, 잠깐 뜸을 들였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례를 구하는 겉치레가 없어도 자신의 뜻을 읽어낸 나기사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런 인사를 내뱉으며 이바라는 이 고요하고도 정적이며, 눈앞의 크라바트 외에는 틀어진 것 하나 없는 분위기를 만끽하듯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능소능대한 나기사라 하더라도 이 크라바트만큼은 어려워하는 듯했다. 한쪽이 말려 들어간 칼라를 정리하고, 끝에 달린 레이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두어 번 모양을 잡아주었다. 이바라는 나기사의 따가운 시선이 제게 머무르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고작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황궁의 연회장에 나타나 자신을 찾아온 것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바라는 나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을 곧이곧대로 의도로서 받아들였다. 제게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가 의도하였다면, 그런 것이다. 손이 꼬이지 않도록 천천히 나기사의 목덜미 근처의 셔츠 칼라와 크라바트를 매만져 완성도를 확인한 이바라는 그제야 깊게 숨을 내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날 수 있었다. 보폭이 과했던 탓인지 테라스에 허리가 닿았지만 상대가 반사적으로 뻗은 손에 붙잡혀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다. 이쪽이 난간으로 착각될 정도로 단단한 팔이 붙든 허리가 아렸다. 제 보폭도 모르고 덤벙대다 넘어질 인물로 보인 건 아닌지 가늠하듯 가늘어진 눈이 미소로 변하는 순간까지도 이바라를 끌어당긴 팔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폐를 끼치게 될 줄은 …… . 감사합니다."
"천만에. 나는 이런 식으로도 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것뿐."
"방금 추태는 잊어주십시오. 아, 이제 놓아주시면 됩니다. 각하의 마법은 소리만 차단할 뿐, 정원을 돌아다니는 자들에게는 필히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요."
"...기척에 민감한 이바라라면 미리 몸을 빼낼 수 있겠지만. 네가 그러길 바라니 이만 놓아주도록 하지."
자신의 곁으로 와서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기사의 옆얼굴을 흘긴 이바라가 잠깐의 소란 동안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썼다. 자신의 눈에만 보인다고 했던 푸른 언어는 여전히 나기사의 목을 감싼 채였다. 계약. 한 존재에 대한 제한 없는 소유권을 걸고 이루어진 용과 인간의 거래. 나기사의 부탁 아닌 부탁으로 그에게서 받았던 아쿠아마린을 떠올리던 이바라는 문득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갑자기 비가 내린다면 저들은 어떻게 반응하려나"라고 하신 겁니까? 사뭇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을 내포한 시선이 닿았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인지 허공을 조준하던 동공─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파충류의 눈으로 변해있었다─을 움직여 이바라를 응시한 나기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는 단호한 눈빛에 아쉽다는 듯 입꼬리를 배뚤게 내린 나기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서늘한 기후에 적응되었던 자들에게는 최악이나 다름없을 여름의 열대야에도 순식간에 시원하고도 상쾌한 기운이 발끝부터 머리까지 돈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음 전투까지 휴식기를 받도록 명 받았지요. 각하와 여름이라, 마치 처음 마주한 신전 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영지를 떠나있는 동안 직접 처리해야 할 중요 문서가 쌓인 까닭에 저택을 벗어나지는 못할 텐데 각하께 미리 양해라도 구해야 할지.'
이바라가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시야에 별무리가 담겼다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기사는 이바라 몰래 뿔을 드러냈다 사라지게 하는 행위의 긴장감을 즐기기라도 하듯 머리 위로 새하얀 뿔을 돋우었다. 타인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계약을 한 이래로 간간이 이바라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유추해낼 정도는 되었던 나기사가 정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름. 너와 신전에서 마주하고, 전장에서 '멸망'을 상대하였던 계절. 벌써 한 해가 흘러감을 자각한 나기사는 이내 자신이 고작 일 년의 시간에 '벌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짧은 탄성과 함께 입가에 손을 가져간 나기사는 지금 제게 드는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흥미와는 사뭇 다른 느낌. 인간인 이바라에게 상담한다면 분명 수일 내에 이것의 이름을 알게 되겠지만, 그 감정을 피워낸 본인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나기사는 제 탄성을 듣고서 시선을 이쪽으로 돌린 이바라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가의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이바라는 그 어떤 고민도 없는 눈으로 마치 자신의 행동을 모방하듯 턱을 매만지는 나기사를 지켜보았다. 예전부터 이어진 생각으로 나기사가 제게 어미 새를 본 새끼의 각인 효과처럼 동작하고 있다 느낀 이바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간혹 자식을 돌보는 수준으로 수많은 요소를 직접 챙겨주긴 했지만 이러한 감상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입에 머금는 순간 일어날 일이 명확했기에, 이바라는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그저 잠시 숨을 돌리던 중 저도 모르게 내뱉은 것이라 답했다.
"...회의는 어땠어? 나에 대해 궁금해하던가?"
"폐하께서 용인하셨기에 별다른 언급은 없었으나, 제 소견으로는 각하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침묵이 길어지자 본래의 목적을 밝히듯 나기사가 물었다. 그를 가지겠다 선언한 이후로 나기사의 의문과 호기심을 채워주고 그의 영양 상태─용이라면 사소한 식사 정도는 하지 않아도 좋지만 지나친 당류 섭취가 버릇으로 자리 잡는 현상은 좋지 않았다. 더구나 초콜릿은 지금 시대엔 귀한 사치품이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하물며 의복까지도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던 이바라는 습관적으로 보고를 하듯 대답했다. 이후로도 회의의 내용과 황제가 저를 불러서 보였던 반응까지 전부 나기사에게 전달하던 이바라가 갑자기 입가를 매만지며 낮게 웃는 나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이런, 저도 모르게 들뜬 건가요. 언제 마법을 사용한 건지 허공에서 나타난 플루트 글라스 잔 두 개를 양손에 쥔 나기사가 하나를 건네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나기사의 이마에 돋아난 뿔을 발견한 이바라가 한숨을 내쉬었고, 평소답지만 어쩐지 목울대가 간지러웠던 까닭에 나기사는 먼저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 아이. 아무래도 곤란하려나."
"흐음. 시종의 입장이 된 적이 없어 잘 모릅니다만. 각하께는 한낱 장난 수준일지도 모르나, 전장에서 갑자기 손에 쥔 검이 사라진다면 저라도 놀랄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렇구나, 이해했어. 그 아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무인 거네."
"하지만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이 불초, 각하의 자애로운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 시종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지는 않으니 제때 빈 잔만 돌려준다면 곤란한 일이 생기진 않을 겁니다."
플루트 글라스의 목을 잡고 천천히 흔들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기사가 불빛을 반사하는 잔의 표면을 응시했다. 앞가림을 넘어선 수준으로 제게 할당된 이상의 일을 해내는 이바라를 걱정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저 호기심이라는 이름으로 수식해버린 우려에 이곳으로 왔던가. 어쩌면 자신보다 먼저 모시고 있던 자가 황제라 하기에 그를 알현할 때 제 존재로 인해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우려했던 마음이 컸을 나기사는 황궁을 찾은 자리에서 이런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아직 너의 영역에 온전히 발을 들인 것이 아닌가. 그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나기사는 이조차 이바라에게는 의미 없을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삼키며 잔을 기울였다.
"각하의 출신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손을 써두었습니다. 감히 각하의 위명을 보고도 달려드는 불나방이 있을진 모르겠으나, 워낙 권모술수가 난무하는지라."
"...이바라는 많은 것에 능숙하구나."
"앗핫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원하는 시점에서 제 귀에 정보가 들어오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자기방어에는 빈틈이 없으니까요. 느닷없는 칭찬에 나기사를 흘긴 이바라가 멋쩍게 웃었다. 물론 칭찬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정말이지 지나치도록 짙은 다정을 가장한 표정을 마주하기에는 속이 울렁거리기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비스듬히 흘려버렸다.
"어쩐지 들떠 보이네."
"예. 모로 봐도 각하는 결코 제국에 해를 끼치는 악재나 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까요."
"...적? 이바라는 제국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 나도 굳이 이들을 해할 생각이 없는데."
"각하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물론 당신을 소유한 저의 판단에 따라 칼날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 분명하기에 말을 말로써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나 …… 표면상으로나 기록상으로나 저는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어서요."
서로의 실리를 위해 이룬 관계에는 믿음과 의리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배신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을 홀로 삼킨 이바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애당초 인간들의 사회에서나 통할 관계였으니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입에 가져가지 않았던 와인을 잠깐 응시한 이바라가 잔을 가져오며 눈을 감았다. 코를 자극하는 꽃의 향과 감귤 향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로마는 어째서 사람의 정신을 비무장 상태로 만드는 주류가 연회에 필수적으로 제공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탁상공론의 현장보다 연회에서의 대화가 더 생산적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리 생각한 이바라가 잔을 들어 올리자 출처를 모를 빛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작은 거품들이 영롱한 빛을 머금었다. 이바라는 칠링 되어 차가운 잔 속에서 피어오르다 표면에 이르러 덧없이 사라지는 기포를 응시하였다. 투명한 잔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 관심 없던 저 거품의 끝마저 명백하게 보인다. 그래. 상호 간의 욕망을 가늠할 수 있는 자들끼리의 연합은 이런 것이 문제였다. 충실한 무기이자 다른 귀족의 견제 수단으로 쓰이는 역할을 자처하여 얻어낸 젊은 시기의 영광을 곱씹은 이바라가 한숨을 내뱉었다. 나서서 직접적인 견제의 표적이 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무려 타 대륙의 용과 계약하여 황제조차 속이려 드는 이런 미래를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대답은 "아니다"뿐이었다.
"날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그리고 상대가 각하, 당신과 같은 불가해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도 어리석은 계책 따위는 함부로 부릴 수 없을 테니 안전합니다."
목을 쥔 제 손아귀에서 서서히 온기를 얻어가는 잔을 흔들던 이바라가 먼 곳의 불빛을 보며 속으로만 되뇌었던 말을 꺼냈다. 자신을 따라 전장의 이곳저곳을 누비는 것에 대한 거부감조차 없던 나기사가 스스로의 목에 계약의 표식을 걸었던 것을 상기한 그는 찰랑거리는 표면을 바라보다 입술을 비뚤게 비틀었다. 그와의 만남이 충동에 의한 것이었기에 관계와 계획의 연속에 끼어든 불순물마저 충동인 것이 틀림없다. 표면적인 견제가 없을지언정 언젠가의 '계약 만료'가 있는 날의 결말을 추측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인 압박이 된 까닭에, 이바라는 자신의 욕망과 충동으로 만들어낸 계약의 고리에 스스로 목을 내건 채 언젠가 흐트러져버릴 불명확한 평화를 떠올렸다. 이에 파도가 내달려 포말을 일으키듯, 또 한 번 충동이 일었다. 나기사가 가져와 권했다 한들 제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어 입을 가져다 대지 않았던 잔을 들어 이바라는 단 한 번의 호흡으로 그것을 들이켰다.
"이바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 …… 생사 여부가 보장된 전장 말입니다."
음미하지 않아도 달콤하고 풍부하며, 향긋한 풍미를 자아낼 이것의 맛을 알기 때문에 굳이 나서서 알코올을 섭취하지 않는 것처럼 구태여 나기사의 의도를 묻고 그가 바라는 끝을 묻지 않아야겠다는 다짐마저 이 와인의 부질없는 기포처럼 여지없이 산화되어버린다.
"비록 참전하는 재미는 떨어질지언정 이득과 손해가 미리 계산되어 있으니 정해진 수순을 따르는 말들을 상대로 술수를 부려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는 과정에서의 즐거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거대한 방해물이자 기반인 멸망과 황제는 나기사라는 단 하나의 존재를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견제가 되었다. 멸망에 대해서는 나기사에게 질문을 던져 얻어내야 할 대답이 있었지만,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듯 제국에서의 관계는 어느 정도 선을 지키기만 한다면 서로에게 손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걸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필히 이익만으로 귀결될 것이다. 실수는, 실수만큼은. 이미 신전에 발을 들여 나기사를 만나 수많은 변수의 미래를 만들어낸 그때의 것으로 충분하며, 이미 자신은 그 실수로 생겨난 현재에서 미래를 꿈꾸며 어떻게든 이익을 도모하고 있으므로.
"저는 이러한 경험으로 충분합니다."
나기사는 잔의 절반이 남은 와인을 난간에 내려놓은 채 뒤를 돌아 걸어나가는 이바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모든 선택권을 맡겼기 때문에 그가 직접 보고하듯 말하지 않으면 그 무엇에 대한 진실도 알 수 없었던 나기사는 이바라가 마법의 경계를 넘어 장막 너머로 사라지며 만들어낸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바라의 옷자락이 스쳐 흔들거리는 막에 대고 조용히 이바라의 이름을 부른 나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곁에 남은 이바라의 잔을 보았다. 이바라의 제안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 없기에 그저 무표정한 낯으로 일 년의 시간을 보냈건만, 여전히 느리게 기포가 솟아나는 와인이 마치 그가 제게 남긴 수많은 의문과 호기심이 방치된 모습을 닮은 것 같아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바라, 너는 '멸망'이 나의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한데."
자신의 계약으로부터 비롯된 힘의 영향을 받아 멸망의 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이바라가 그 한 해 동안 제게 드러내지 않았던 물음이 있다. 어째서 그것이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가. 가벼운 손짓으로 잔을 공중에 들어 올린 나기사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잔의 목을 쥐었다. 이조차 이바라가 가져다준 책의 내용에 적혀있었기에 학습해낸 예법이었지만, 나기사는 오래전의 버릇이 있어 의도하지 않아도 우아한 기품이 서린 손가락으로 목을 집었다. 시종에게 가져다주어야 하니까. 그런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멋대로 덧붙인 채로.
"후후, 역시 인간은 흥미로운 존재구나."
처음으로 마주했던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게 그릇된 욕망만을 보였지만, 너와 함께 한 짧은 시간은 너에게 모습을 보인 나의 간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나기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내 이바라가 남긴 와인을 들이켰다. 목울대를 넘어갈수록 풍미가 짙어지는 과일 맛이 입가를 맴돌았다. 잔에 남은 액체가 줄어들수록 그의 이마에 돋아난 뿔이 옅게 사라져갔다.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고 무엇인가를 선언하듯 내뱉고서 제멋대로 자리를 벗어나버린 이바라는 이대로 헤어져 저택에서 만남을 갖길 바란 듯하나, 이번만큼은 그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던 나기사가 입가에 남은 액을 훔쳐냈다. 감미의 끝자락에 남는 것은 허무한 담향이 전부였기에 옅은 웃음을 흘린 나기사는 이내 지긋이 눈을 감고서 몸을 돌렸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흐트러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허공을 가르는 막은 아주 잠깐 두루마기가 되어 그의 흔적을 쫓았다. 투명한 물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물방울이 그들이 서있던 테라스의 바닥에 닿을 무렵, 그곳은 아무런 인기척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그런 도피처가 되어 서늘하게 식어만 가고 있었다.
"이바라."
범람하는 사치의 너울 속에서 운 좋게 발견한 초콜릿의 위치를 기억해 낸 나기사가 손에 접시를 들고서 회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바라가 마련된 방으로 향하거나 주요 인사들을 살피러 홀에 나갔으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종조차 없는 회랑에 홀로 있자, 손으로 집었던 초콜릿 하나를 다시 내려놓은 나기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이바라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작은 보폭으로 휘적휘적 걸어간 까닭이었다. 아무래도 휴식을 취하려는 목적이었던 건지 녹주석을 손에 쥐고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어떤 말을 하는 듯한 모습에 잠깐 제자리에 멈춰 선 나기사가 끝내 초콜릿 하나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는 눈빛에 의문을 녹여내듯 혀 위로 안착한 초콜릿을 누그러뜨리며 응당 청승과는 거리가 멀지만 밤을 헤매듯 저리 거니는 이유가 달리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으음. 그들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언젠가 저 위대하고도 섬뜩한 힘이 이쪽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라는 불안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불확실성은 배제되어야죠. 나기사는 말상대가 없어도 스스로에게 자각시키듯 되뇌는 이바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백불일실. 자신이 살아날 길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있기에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 단 한 번의 일탈도 허락하지 않는. 자생자결을 꿈꾸었으나 자신을 만나며 불가피하게 언제 사라질지 모를 미지의 힘을 빌리게 되어 무의식적으로 불안해하는 이바라의 기저를 알았던 나기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숨을 뱉었다.
"승기를 잡은 이후로 적당한 수준의 토벌로 끝나기 시작한 전쟁은 어디까지나 권력 구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었죠."
"...내게 털어놓아도 될 문제일 텐데. 정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여겨질 때면 도움을 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이바라."
"아뇨! 고심하여 궁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국의 정세와 관계없이 저희의 뜻대로 멸망을 토벌하는 비인륜적인 짓을 해버리는 수밖에요!"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하기에 마저 대화를 나누려던 나기사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바라의 행동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그를 지켜보던 나기사는 어째선지 진중하던 아까와는 달리 상기된 듯한 목소리를 비롯해 홍조가 되려던 차에 겨우 제 빛을 찾은 피부를 알아차렸다. ...이바라, 주류에 약하구나. 의외인걸. 적당히 기분이 상기되는 선에서 자제한 것이 틀림없지만 타인의 눈과 귀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조차 이렇게 풀어진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나기사는 잠시 말을 아꼈다. 여기서 내버려 둔다면 분명 훗날에 와서야 왜 자신을 말리지 않았느냐 불평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기사가 가볍게 손을 내저어 아까의 차음막을 펼쳐내고는 조용히 이바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원형 실내 정원을 감싼 회랑의 끝은 연회의 다른 입구였다. 점차 사용인과 여타 인물이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가벼운 암시로 이바라의 존재감을 지워낸 나기사는 그가 층계를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았다.
" - 해서, 실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번, 제멋대로 하는 말을 뒤쫓아 마무리되어버린 문장이 나기사의 귓가에 닿았다. 화려한 장식으로 음각이 새겨진 난간을 짚은 이바라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다시 한번 그가 홀로 말을 내뱉은 것이라 착각할 정도였으니, 이번에는 대답하듯 말을 덧붙이지 못한 나기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각하. 이런 판단을 하는 제가 혹시라도 질린다거나 싫어진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아득한 천장에 효수된 채 저마다의 야망을 두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샹들리에보다 더 찬란한 빛의 야망을 드러낸 낯이 자신만을 마주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이바라를 낮은 곳에서 올려다본 적이 없음을 깨닫기도 전에 새파란 전율이 발끝을 타고서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 하나였던 존재가 인간에게 휘둘려 둘로 깨어진 이후로는 그 어떠한 수단으로도 얻지 못한 자기 이해였기에, 나기사는 대답을 기다리듯 방긋 웃고 있는 이바라의 얼굴을 보고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인간의 선택으로 해를 입지 않으리라 확신한 오만의 바다였기에 네가 그 어떠한 독을 풀더라도 오염되지 않는다 여겼다. 네가 나를 소유하기를 소원하였기에 너의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반발심이 싹트지 않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바라가 단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질리거나 싫어진다면'이라는 가정을 입에 올려 자신에게 묻는 순간, 나기사는 단순한 소유관계만으로 자기 의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드물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참으로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천변만화의 화신으로 묘사되어 동대륙의 수호자가 되었던 과거의 위상은 고작 인간의 간섭으로 쉬이 변모될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바라에게 선택권을 주고 그의 대답을 따랐던 이유는? 나기사는 작게 침음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바라가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그에게 흥미를 느낀 것이라면 저 아래 서로 뒤엉킨 인파의 대부분에게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고개를 내저은 나기사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바라가 자신을 고려하여 부탁을 해왔기에 그의 선택을 따라 움직였더라면 죄 없는 자들의 죽음을 외면할 때 그를 무시하고서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그들을 구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바라지? 나의, 아니, 이바라의 무엇을? 혼란이 수위를 높이며 차오르기 시작한 즈음에 해답을 구하듯 고개를 들어 이바라를 마주한 나기사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이유만을 묻고 싶어."
영원히 변화하는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을 탐하는 너의 선택이 궁금하였고, 그런 선택이 불러올 결과에 호기심이 생겼다. 본래 변화의 원동력은 새로운 것을 탐하고 욕망을 사랑하는 무궁한 가능성으로의 탐구욕과 진실로의 갈망이었고, 이는 곧 자신의 정체성이자 란 나기사라는 이름의 뜻 그 자체였으므로. 첫 인간이 내게 상실과 함께 '내가 아닌 것'을 알려주었듯 너는 나에게 자극을 주었으니.
"'이유' 말입니까. 네, 좋습니다."
난간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낸 이바라가 동요가 인 나기사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제국과 멸망의 일, 그리고 개인적인 관리를 제외하고는 제약을 두지 않고 정말 자신이 제안한 대로 '나기사를 모시며' 살아왔던 이바라는 그동안 나기사가 자신의 욕망을 도통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일 년의 보필, 그리고 손에 꼽지도 못할 정도로 드물었던 표출. 그랬던 그가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으로 하여금 그토록 불신하였던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도록 종용했던 적갈빛 눈에 격정으로 뒤덮인 파도를 일으키며 물었다.
"세상을 죽이는 '멸망'은 당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각하."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이런 이런. 한 번 물꼬가 트이니 이유를 묻는 말이 곱절이 되는군요. 원리야 간단하잖습니까. 그 무한한 힘, 마치 천변만화의 화신처럼 규정되지 않은 모습, 그리고 이 아쿠아마린을 소지하고 있을 때에만 보이는 원형까지. 각하 당신과 무척이나 닮아있더군요."
"...네 말이 맞아. 그것은 나의 일면. 인간이 멸망이라 정의 내린 것은, 내게 처음으로 소원을 빌었던 인간으로 인해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야."
곁을 스쳐가는 부부를 흘긴 이바라가 층계를 하나 내려오며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덧붙였다. 대체 어느 간 큰 인간이 감히 각하의 등을 쳐먹었을지 몰라도 귀감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간악하고 지혜로우며, 다만 최악의 쓰레기 같은 자입니다. 신랄한 비난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자 평가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 덕분에 나기사를 자신의 무기이자 아군으로 얻을 수 있었음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를 속으로 덧붙인 이바라가 손가락을 세워 난간을 두드렸다. 아직 그것만으로는 완벽한 해답이 되지 않은 듯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나기사에게 다시 한번 다가간 이바라는 또 어긋난 그의 크라바트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각하의 일면 또한 필요악입니다."
목 아래를 스쳐가는 감각에 레이스의 주름을 다듬는 이바라의 손가락을 잠깐 보았던 나기사가 고개를 들어 이바라를 응시했다. 오래전에 버려야 했던 자신의 일부조차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은 처음이었기에, 의뭉스러운 겉가죽 아래에 숨은 민낯을 살피려는 눈의 동공이 좁아졌다 이내 다시 인간의 것으로 돌아왔다.
"이 세계는 적재적소,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굴러가는 쳇바퀴입니다. 제국의 군림 이래 끝없이 썩어버린 고인물을 정화해 내는 '절대적 필요악'이 각하가 되어버린 이상, 저에게는 최전선에서 당신의 정체를 숨기고 필요악에 대적할 의무가 생긴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잘 되었다고 생각한 거지?"
"그 누구도 비견할 수 없을 당신이 제게 있으니까요."
다 되었다 속삭인 이바라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쫓던 시선이 이내 그의 푸른 눈에 닿았다. 평소보다 더 당당하게 펼친 어깨 위의 금속 장신구가 서로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으나, 이 복잡 화려한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바라의 목소리뿐인 것처럼 귀를 기울인 나기사가 작게 웃었다.
"각하께서 제게 당신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듯, 저 또한 자신의 '보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알려드린 겁니다."
"...결국 너는 나를 가졌지만 나는 너를 얻은 것이로군."
드디어 상호 간의 이용 관계를 결과로 도출시킨 이바라 또한 그런 나기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로 눈에 보이지 않은 진리와 자극에 흥미를 느꼈던 당신을 물질세계의 보잘것없는 제게 묶어두었으니, 창과 방패 모두 당신으로 이루어진 전장에서의 승리는 당연한 수순이었으므로.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술기운이 잠깐의 걱정과 함께 휘발되어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은 경쾌한 기쁨이 부추기는 대로 움직여도 손해될 것이 없다 판단한 이바라가 아래에서 들려오는 왈츠에 맞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보이지 않으면 여러 낭설이 떠돌기 좋은 조건이 됩니다. 이만 마법을 거두어주시겠습니까, 각하?"
"싫어."
"예?"
나기사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던 이바라는 곧장 제 팔을 붙잡고 고개를 내젓는 나기사의 행동에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을 부르려는 기미가 보여 굳이 몸을 비틀어 피하지는 않았으나, 한 번 알려드렸다고 곧장 의견을 피력하는 나기사가 짓고 있는 표정이 너무 단호한 까닭에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돌아본 이바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그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이려는 듯, 나기사가 잠시 좁힌 미간을 곧게 풀어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의 이바라는 너무 빛나. 저들이 금방 너의 변화를 눈치챌 거야. 올바른 보상을 줄 테니, 지금은 나의 말을 따라. ...명령이야, 라고 하지 않아도 나의 이바라라면 잘 이해하겠지."
"앗핫하, 역시 각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를 알려드려도 열을 아시며, 소꿉놀이를 하여도 천군만마를 베어버리는 무궁한 지식! 그런 각하와 함께 할 수 있음에 이 사에구사 이바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는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어버린 이바라는 각하의 혜안 덕분에 지금도 주변에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었노라 말했다. 멸망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겪고도 건재한 제국의 귀족들조차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샹들리에의 빛보다 더욱 찬란한 색이 그를 뒤덮는 광경은 참으로 현혹스러울 뿐이었다. 여전히 제게 물었던 감정의 이름을 밝혀내고 그것의 형태를 정의하지는 못했으나, 이바라의 이름으로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만족하기로 한 나기사가 작게 웃었다. 아아. 나의 선택이 너였기에 다행이노라. 그런 안도와 기쁨을 속으로 감춘 채 그는 이바라가 이끄는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바라가 자신의 뜻을 따라주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의 적으로 가득한 연회를 걷는 행위가 그리 나쁘진 않는 것 같다 생각하며.
때는 드문 폭염이 내린 한여름의 오후였다. 나기사와 응접실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이바라는 갑작스레 잔을 내려놓고서는 바깥 한곳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사용인을 모두 물려 불편한 요소를 최대한 배제시킨 것인데, 나기사는 마치 자신보다 더 그의 신경을 끄는 무엇인가가 생겨난 것처럼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이에 이바라는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연회에서의 일 이후로 드디어 자리 잡기 시작한 이 주종을 빙자한 상호 이익의 계약이라는 기묘한 관계가 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 주변에는 너와 나를 주시하고 있는 자가 많아."
"그렇습니까?"
"응. 멸망보다는 제국과 관련된 자들로 보여."
마치 영애들의 티타임 도중 과거에 유행하듯 정원에 놓인 분수를 가리키며 '이 분수가 이어진 연못에는 참 아름다운 관상어가 많습니다'라고 말하듯 평온하게 하는 말이었다. 저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 듯 차를 들이켠 나기사가 칭찬을 바라듯 이바라를 응시했다. 거창하지만 진정한 감격은 배제된 감동 어린 찬사가 시작되자마자 만족스러운 듯 웃는 그 속 편한 낯에 이바라는 남몰래 한숨을 삼켜야 했다.
이윽고 샌드위치와 스콘, 그리고 비스킷과 마카롱이 순서대로 쌓인 디저트 트레이에 손을 뻗어 비스킷 하나를 집은 이바라가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집사장에게 저택 관리를 맡겼더니 아무래도 긴 시간에 걸쳐 걸러두었던 작자들이 다시금 빈틈을 노려 잠입한 모양이었다. 이바라는 잠깐 과거의 기억에 젖어들며 비스킷을 한 입 물었다. 기껏 얻은 휴식 시간에 각하와 보내는 오후의 티타임을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해버렸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한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다못해 엄격한 가문에서도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자들이 있는 반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변경백으로서 남들이 깔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던 지나간 때의 치부와 공력. 그때 가장 먼저 제거했던 끄나풀이 이번엔 각하와 자신을 동시에 노리고 있음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킨 이바라가 비스킷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곱게 가꾼 정원에 생긴 잡초를 제거하는 일 정도야 늘상 해오던 일이라, 오히려 용과 자신을 상대로 은신을 시도한 그들을 한심하게 여길 지경이었다.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누군가의 총애는 적당한 수준의 견제와 같은 말이어서요. 뭐, 그 총애조차 허울뿐인 제재 수단인 게 문제입니다만."
"...모두가 너를 견제하고 있구나."
"상관없습니다. 고작 그 정도 독으로 죽을 정도였더라면 애초에 독사라 불리지도 않았겠지요."
"그들은 독충보다는 기생물의 하수인 같았지만."
작은 초콜릿이 세팅된 접시 위를 부유하던 시선이 이바라에게 곧게 닿았다. 그제야 시선을 눈치챈 정원의 누군가가 창 너머로 보이지 않는 공간을 찾아 숨은 것까지 보았지만, 이바라 또한 아는 듯한 낌새였기에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기로 한 나기사가 조용히 잔을 들어 따뜻한 차를 들이켰다. 온기가 전신을 돌았다. 더구나 이에 곁들이듯 덧붙여진 이바라의 이런저런 목소리에 ─나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열심히 설명을 하는 이바라가 생각을 읽었더라면 짜증을 내며 토라졌겠지만─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들어서, 나기사는 의자의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후후하고 작게 웃었다.
"아, 방금 그 장면은 잊어주십시오. 각하께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만 보이는 추태를 저지를 분자들에 불과하니까요. "
"...저 아이들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이바라가 마음에 들어 할까?"
"예? 아니오! 부디 재고해 주시겠습니까? 저들은 반면교사로 삼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인간이 되지 못한 자들이니까요."
순간 인상을 쓰며 재빨리 덧붙이는 말에 결국 먼저 웃음을 보인 나기사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때로는 이바라가 진심으로 곤란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갑작스럽게 말을 내뱉는 행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렇게 이바라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재미가 있는 까닭일 것이다.
"만약 다른 평가가 떠오른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고쳐드리겠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매력이라고 생각했어. 후후. 이바라, 너에게 끌린 것도 눈동자로 보였던 불씨에 흥미가 동했던 까닭이지."
"아하하, 과찬이십니다."
조용하지만 그럼에도 소리 내어 웃는 나기사를 응시하던 이바라가 그 낯을 살피다 입매를 휘어 미소를 지었다. 숨을 돌리기 위해 저택 밖으로 나갈 여유조차 없던 즈음이라 늘 홀로 서재에만 있던 나기사가 이렇게 햇빛을 받으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 앞으로의 일정에 오후의 티타임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