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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든 아침의 한 순간.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한 악몽의 한 자락에 휘말려 벗어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골라쉬었다. 몇일 째지? 오늘로 벌써 1주일째. 같은 내용의 악몽을 꾸는 것도 모자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꿈. 생생할정도로 고통스럽게 전달되는 꿈안의 내용에 괴로움에 허덕이며 눈을 뜨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누구인지 모를 사람에게 깊숙히 칼에 찔려 쓰러지는 스스로의 육체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허망하고 지치고 무거운 꿈. 그리고 그 무너지는 몸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과 범인까지. 불안감과 함께 눈을 떠 타블릿 피씨의 스케쥴 표를 확인하고 자기도 모를 한숨을 옅게 쉬었다. 묵직하고 짙은 색채의, 마치 느와르 영화처럼 영원히 이어질것 같은 느슨하고 씁쓰름한 세계에 갖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옅게 흐르는 바람에 고개를 기대었다. 덥고도 시린 여름이었다.

 

안색이 안좋으시네요, 라는 인사에 건성으로 대꾸한 이바라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의 접대가 이루어지는 날. 자신들에게 맞겨도 충분하다는 직원들의 만류에도 자신이 해야할 일은 직접 하는게 맞다는 부드러운 거절의 의사를 밝히며 직접 주차장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잠시 타블릿을 확인했다. 손님 접대 외에는 자잘한 스케쥴이었다. 요새 부쩍 예민해진 신경줄을 다잡으며,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힐끗 확인했다. 묘하게 지쳐보이는 얼굴이 신경쓰였지만 애써 모른척 넘기며 사이드 브레이크의 핸들에 손을 가져갔다. 오늘의 시작이었다.

 

 

 

 

 

그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힐끗힐끗 룸 미러로 보이는 상대의 얼굴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최악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단정하고 반듯하게 이목구비가 자리한 수려한 얼굴에 마음과 호의를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정도로 괜찮은 남자였다. 룸 미러를 조정하는 손길이 조금 떨리는 것을 느낄 정도로. 그런 내면의 혼란스러움과 교차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사에구사 이바라는 눈 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다시 생각해도 이런 자신은 최악이다. 역시 드라이버를 동승하는게 나을 뻔 했다, 라는 뒤늦은 판단을 떠올렸다. 그런 자신에 비해 유리알처럼 말간 얼굴을 하고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호텔에 데려다주고 생각해 보자. 자신 답지 않은 판단인 걸 알면서도 그 이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식의 주먹구구식 해결 책은 사에구사 이바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올릴 수 없는 위험한 상황.

 

"...우리, 만난적 있지 않습니까?"

"네?"

 

이게 무슨 미친소리,냐는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표정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어디서? 당신을? 이 정도로 근사한 남자를 만나고도 기억을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정신없이 머릿속을 휘젓던 자신을 멈춰세우게 한 것은 그 남자의 이어지는 말이었다.

 

"...꿈에서."

"...하...."

 

허탈함에 자신도 숨기지 못하고 흘러나온 한숨에 남자는 옅게 웃었다. 순간 바보같은 표정을 지은 것 같아 얼굴이 약간 상기된 이바라가 입을 열었다.

 

"란 씨는 꽤 재밌는 구석이 있으시네요."

"...진지하게, 조금 더 생각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시시한 장난 따위가 아니라는 듯 진지하게 입을 연 남자를 빤히 바라보던 이바라는 말없이 꾹 입술을 다문채 그를 응시했다. 꿈? 최근의 컨디션을 망가트리고 있는 그 빌어처먹을 꿈에 누군가 나오던가? 가해자쯤 되는 포지션이면 납득이라도 할텐데. 아, 그 쪽인가?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남자는 희미하게 입술에 호를 그리며 웃었다.

 

"...어느 쪽을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유해하지도 무해하지도 않을 스쳐지나가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던가?

무수하게 스쳐지나가는 검은 인영들 사이에서 총천연색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자기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수십 수백의 낯선 사람들 중에 당신이 있다고? 조금 비웃고 싶은 기분이 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한참의 고민끝에 내놓은 대답은 평이했다.

 

"그렇군요."

 

멍청이라도 된 듯한 스스로의 바람빠진 대답에 이바라는 비웃고 싶은 기분이 되는 것을 애써 참으며 옅게 웃어보였다. 주차를 마친 차 안에서 걸어나온 두 사람은 호텔 직원에게 가벼운 수속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발걸음을 옮겼고, 3124라는 팻말앞에서 두사람의 걸음이 멈춰섰다.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나와 손잡이를 꾹 움켜쥔 그가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나기사는 발걸음을 옮겨 열린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약간의 소음과 함께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상대를 향해 웃어보였다.

 

 

* * *

 

 

오늘도 이어지는 꿈.

조금 달라진게 있었다면 쓰러지는 자신의 몸을 붙잡는 희미한 체온같은 것을 느꼈다는 정도였다. 꿈 이야기를 해서 그래, 샤워기의 물길에 몸을 맡기며 되뇌이는 한마디였다. 감각은 연약하다. 누군가의 침입으로 그 형태를 달리할 만큼 섬세하다. 그런 형태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어리거나 약하지도 않다. 하지만 맞닿은 손가락 끝의 온기가 너무 따듯해서 조금 위로받는 기분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어디로 모셔드릴지 말씀을 안하셨다고 하셔서."

"...어디든 좋아. 이 도시는 처음이니까."

 

회색빛의 도시를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가볍게 일렁였다. 이런 싸늘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디찬 도시에서 상냥함을 담아 건네는 상냥한 인사가 마치 자신의 소유물에 보이는 일종의 자애와도 같았다. 청명한 여름날의 잎사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잿빛의 도시. 표면이 일렁이도록 녹아내리는 열기에도 그는 생생하게 움직였다.

여름 휴가로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혼자 조용히 중얼거린 한마디를 못들은 척 넘겼다. 열기에 녹아내린 세계에 기대어 선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롯폰기의 모리타워로 목적지를 정한 이바라는 말없이 액셀을 밟았다. 사에구사 이바라는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좋아했다. 발 아래 놓인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거리감이 주는 감각이 좋았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거라는 확신과 함께 이동을 하고, 주차를 한 뒤에 그의 손을 이끌었다. 열기와 습기가 식어 서걱서걱한 느낌이 나는 반듯하고 잘 뻗은 손가락이 남자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밤에 오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지만."

"...좋아해. 고마워. 해가 머물러있는 시간도 좋아해."

 

벽에 걸린 그림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았다. 천국에 가장 가까운 미술관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공간을 자신의 것처럼 아우라로 잠식하는 남자. 이 무더운 여름, 당신은 왜 재색의 도시에 재림했을까, 마치 구세주라도 된 것 처럼.

안내직원으로부터 건네받은 메모지와 연필로 감상을 적어나가는 나기사는 그림처럼 그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부서져내리는 도시의 색처럼 그 파편의 반사광을 휘감고 있는 남자. 사에구사 이바라는 손을 뻗어 스스로의 입을 가볍게 틀어막았다. 내뱉지 못한 탄성의 비명속에 란 나기사라는 남자가 있었다. 한참을 묵묵히 침묵 속에 스스로를 밀어넣고 있던 이바라가 입을 열었다. 자, 돌아가시겠습니까? 나기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 * *

 

 

그 꿈의 진행하는 방향이 있다면 이것이리라.

그 어떤 소리도 차단된 듯 정적속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자신의 몸을 어느정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있었다. 실제로 찔린듯 아프게 흉곽을 죄어오던 고통이 오늘도 나이프의 날이 몸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치고 올라왔다. 왜, 나는, 자꾸, 당하기만. 치밀어오른 억울함과 함께 상처를 감아쥔 채 바닥으로 쓰러지는 자신을 누군가가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식은 땀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의 뺨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느껴지는 익숙한 우디한 향기. 청명한 숲 속에 들어온 듯 안정감과 함께 축 늘어지는 자신의 몸을 추스리는 손길을 느꼈다. 당신,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말하지 못한 질문이 스멀스멀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쌉싸름한 샌달우드의 향이 났다. 꿈일까 현실일까, 어느 쪽이든 경계를 넘어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에게 몸을 기대었다. 한참 위축되어있었던 몸이 부드럽게 풀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이제는 그냥 잠들어도 돼, 다정하게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뜨지 못한 눈을 다시금 감았다. 옷깃을 정리해주는 다정한 손길에 귀를 기울이다 자신도 모르게 의식의 끈을 놓았다. 좋은 꿈 꾸길 바라.

 

 

* * *

 

 

"오늘도 어디로 모실지 말씀해주지 않으셨다고 하셔서."

"...사에구사 군이 데려다 주는 그 어느 곳이든 충분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늘도 조금 시원스러운 풍경을 보는게 좋지 않을까, 해서. 라는 사족과 함께 스카이트리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 안정적이고 무난한 관광 코스를 밟아가며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야경이 알맞을 터라, 대낮의 도시 구경은 조금 아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란 나기사는 그 어떤 장소가 되든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역시 미술품이나 문화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도쿄국립박물관도 그리 멀지 않으니, 그 곳으로도 모시겠습니다. 다행히 휴관일이 아니더군요."

"....일단 스카이트리를 들르고 싶어. 근처 아사쿠사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

 

생각보단 자기 의견이 분명한 타입이라는 생각을 했다. 느슨한 듯 팽팽하고 촘촘하게 짜여진 금속의 끈 처럼. 그런 시시한 상상과 함께 스카이트리의 고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를 향했다. 전망대를 향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린아이들이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는 광경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기사에게 시선이 향했다. 의외로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구나, 그런 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겉보기와 내면은 다른법이라고 하지만 차가운 겨울향기가 나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따듯한 행동은 의외라고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듯이 쌉싸름하게 울리는 우디한 향기까지. 언밸런스하게 이루어져 형태를 갖춘 란 나기사라는 남자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전망대의 데크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라보던 나기사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그저 중요한 손님일행의 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넘겨버리기에 의미심장한 말을, 마치 알고 있는 것 처럼 하는 남자. 그 비밀스러움에 닿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는 한 편, 궁금함에 마음 한 켠이 들뜨는 것을 애써 참았다. 데크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어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감상한 나기사가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사에구사 군, 꿈을 꿨어."

"...네?"

"...최근에 누군가한테 칼에 찔리는 꿈을 꾸지 않았어? 그래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보았어."

"......"

"...꿈 속에서 누군지 몰라서, 곁에 갈 수 조차 없어서 막을 수는 없었는데 이제 조금 닿을 수 있게 되었어."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요?"

 

혼란스러움에 휩싸인 이바라가 입을 열었다. 사적이고 쓸모없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 자신에게 정직하게 꿈속의 이야기를 전부 읽어내는 이 남자에게 조금 두려움이 일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아니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꿈에서 만난적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장난 그만 두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난이 아니야, 나와 사에구사 군은 이렇게 직접 마주하기 전에 꿈에서 먼저 닿았지. 피해자의 사에구사군와 행인의 나, 로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괜찮은 걸까, 물어보고 싶었어. 그게 꿈이라고 해도 무기력하게 당하는 사에구사 군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란 씨의 이야기는 우리는 이미 꿈에서 만난 적 있다는 겁니까?"

"...정리하자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

 

대수롭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는 나기사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이바라가 시선을 돌렸다. 무슨 바보같은 이야기에 말려들어서 응해지고 있는 꼴이라니, 스스로의 멍청함에 환멸이 일기도 전에 나기사가 이바라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던 자신을 바라보던 새빨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선명한 시암컬러, 노을의 빛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붉은 색.

 

"꿈에서 건너, 만나러 왔어. 사에구사 이바라."

 

 

* * *

 

 

내 손을 잡아요, 뛰어요.

 

누군지 모를 검은 인영의 손을 엉겁결에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왜, 당신은, 나를. 목에 콱 차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친 숨이 차오르는 자신을 리드하는 빠른 발걸음. 누군지 모르는 사람인데도 알고 있는 목소리라는 것이 싫지 않았다. 엉겁결에 돌아본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요 몇일 째 계속 이유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는 가해자가 보였다. 알지 못하는 얼굴로 부터 받는 위압감은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눈물이 날 만큼 두려워져서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그 압박감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본능은 두려움의 진원지를 피해 발을 딛게 하는 것이었다. 뛰고, 또 뛰어 도착한 아지트 같은 곳에서 문을 걸어잡그고 그 문에 등을 기대었다. 당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쿵쿵 문 너머로 울리는 발걸음의 소유자에게 목소리가 전해질 새라 웅크린채 속삭였다. 화사한 긴 은발이 흐트러져 내리는 것을 보였다. 나기사는 말없이 옅게 웃어보였다.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잡는 것이 느껴져서 이바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처음으로 마주보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주변에 뿌연것을 끼얹은듯한 경치에서 유일하게 선명히 느껴지는 자신과 나기사의 모습에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도 우연이라고 생각해?

...당신과 일방적으로 닿고 있을 자신의 꿈일지도 모르니까요.

...현실주의자구나, 이바라는.

 

얼굴이 가까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곧 맞닿을지도 모르는 거리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머물러 있었다. 등 뒤의 철문에서 쾅쾅 울리는 소리가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떠, 이바라. 하나, 둘, 셋.

 

 

* * *

 

 

"...사에구사 군은 높은 곳을 좋아하나 보네."

"아무래도, 시원스럽고 좋지 않습니까? 가고싶은 곳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딱히. 사에구사군의 선택도 나쁘지 않아서."

 

어젯밤 꿈때문인지 뒤숭숭한 머릿속을 나기사의 목소리가 휘젓고 있었다. 친근하게 이바라라고 부르던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 오늘은 다른 사람처럼 자신을 사에구사라고 부르고 있는 이 남자는 의문스러움 투성이었다. 하지만 캐묻고 싶지 않은 감각 역시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가끔은 알지 않아야 하는 것을 모른척 해야 하는 것을 잘 아는 사에구사 이바라이기에, 더 캐물으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이바라."

"...네?"

"...달릴 때 손목, 너무 세게 움켜쥐었던거 같은데 괜찮아?"

 

멍하니 자신의 손목을 들어올려 확인한 이바라가 뭔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만 꾼, 꿈이, 아니었어?

 

"란 씨, 당신은 도대체..."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을게."

 

나기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 * *

 

 

오늘의 꿈은 나쁘지 않았지. 죽지도, 다치지도 않은 채 아무런 혼란 없이 편안하게 잠을 청했고, 눈을 떴다. 오늘은 꿈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그 남자. 오늘 직접 만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을 뜨기도 전에 느껴지던 옅은 샌달우드의 향기가 제 방에서 나는 느낌은 이질적이고 어색했다. 그 남자가 마치 방에 머물렀던 것처럼. 오늘 돌아간다고 했던가, 바라본 시계가 알리는 시간은 새벽 4시였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급하게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우스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일방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오른 생각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결심한 이상, 떨리는 발로 엑셀을 밟아 그 남자가 묵는 호텔로, 방으로 향했다. 3124호, 3124호, 몇 번이고 들렀던 익숙한 문 앞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숨을 정리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열린 문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손목을 붙들린채 벽으로 밀어붙여졌다. 익숙한 샌달우드 향이 스쳤다. 아, 겨우 뜬 두 눈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상대를 향했다. 기다렸어, 열렬하고도 차분한 속삭임에 귀 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3도를 유지하고 있을 호텔룸의 규칙을 무시하는 열 법칙에 눈앞이 아른거렸다.

 

"...기다렸어, 이바라."

"...당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떨어지지 않는 물음을 간신히 떼어낸 이바라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당신의 꿈 안에 나를 초대합니까?"

"...이바라의 꿈 안에 내가 닿았을 뿐이야."

"쉽게 말하지 마세요. 믿지 않을 테니까."

"믿고, 믿지 않고는 이바라의 자유야. 나는 이 도시에 휴가를 보내러 왔어.

거기서 만난 게 너였을 뿐이고."

 

바보같이,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납득해버리는 스스로가 싫었다. 하지만 건네지는 위안에 묘하게 몸을 기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손을 뻗었다. 목에 감기는 두 손을 꼭 죄어 안았다. 아, 어쩌면 이 향기를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무더운 여름날에 오직 홀로 청량하게 머물러있는 겨울의 남자에게 빠져버린 것이겠지. 꼭 안겨있는 몸을 감싼 손에서 따듯한 체온이 돌았다. 그리 불쾌하지 않게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모른 척 기대기로 한 것이었다.

경계의 연인

제출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글이나 그림에 대한 저작권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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