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기다림의 너머에

0.

 

 

"이번 여름휴가 땐 호캉스에 가고 싶어."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이바라가 고개를 들어 나기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부소장 사무실, 그의 바로 옆자리에서 나기사는 물끄러미 이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어질 이바라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바라는 조금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이며 그런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말의 내용 자체는 평범했으나 말을 꺼낸 타이밍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여름휴가라면 아무리 빨라도 최소 3개월은 있어야 할 시기에 그런 말을 꺼내다니?

 

그러나 그가 돌발행동으로 자신을 당황시키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이바라는 평소처럼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이야이야~ 호캉스입니까? 무더운 여름철을 시원하고 쾌적한 호텔에서 보내는 건 좋은 선택이군요! 이 사에구사 이바라, 각하께서 보내실 완벽한 여름휴가에 차질이 없도록 좋은 곳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이바라."

 

"따로 원하는 조건은 없으신지요?"

 

"…방에서 바다가 보이는 곳이면 좋겠어."

 

"호오, 바다 말씀이십니까. 오션뷰 또한 호캉스의 중요한 즐길거리 중 하나죠. 그 외에 다른 건? 뭐든 말씀해주시길!"

 

"그리고 이바라가 같이 가줬으면 해."

 

 

이바라는 서류를 들고 있던 손에 무심코 힘을 주었다. 그가 살짝 눈썹을 기울인 채 어딘가 곤란한 말투로 말했다.

 

 

"기껏 제안해주셨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자신은 그 시기에 일정이 바빠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안 되는 거야?"

 

"예, 매년 여름은 성수기니까요. 전국적으로 돈이 오가는 시기다보니 사업가로서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어서 말이죠. 동행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에덴을 위한 일이니 부디 양해해주시길!"

 

"……그래."

 

 

순순히 물러나는 나기사의 모습에도 이바라는 좀처럼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럼 난 언제쯤 이바라와 함께 할 수 있는 걸까."

 

 

나기사는 고집이 있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같은 요구에 갑자기 일정을 비울 순 없다고 말해서 기다렸는데 말이지. 3개월 전에 말해도 안 되는 거구나."

 

"…………."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내년엔 6개월 전에 말하면 돼?"

 

 

그가 나긋한 어조로 웃으며 건네오는 말에 이바라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각하. 마치 저희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 1년에 한 달도 채 안 되는 듯 말씀하고 계십니다만, 저희 동거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동안 하루에 8시간 이상 같이 보내는 날만 세어봐도 1년에 9개월 정도는 붙어있습니다!

 

 

이바라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에덴이 데뷔한 지 약 5년하고도 3개월, 둘이 동거한 지도 한참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는 대체 뭘 원한단 말인가.

 

이바라는 성인이 되자마자 그간 벼르고 있던 것들을 리스트까지 만들어 빠른 속도로 해치웠는데, 그 중 하나는 운전 면허 취득이고 하나는 사업자 등록 갱신이며 하나는 나기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편이 매니지먼트에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쓰고 공간을 대여하려면 적지 않은 자금이 소모된다. 이바라는 전문 기술이 필요한 때를 제외하면 상대를 직접 관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다행히 이바라에게는 나기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능력이 있었고, 나기사 또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이바라의 지시에 잘 따라주었다.

 

 

"이 정도로 같이 지내고 있으면 휴가 정도는 혼자 보내고 싶어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실제로 각하께서도 첫 휴가 땐 '자유여행을 하고 싶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각하께선 다른 사람의 간섭없이 다양한 경험을 즐기는 편을 더 선호하시는 것 같았는데요."

 

"…하지만 이바라는 이런식으로 요구하지 않으면 금방 날 방치하니까."

 

"관심 받길 원하는 어린 아이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정말이지…."

 

"…그리고 이바라는 그때부터 자유여행 금지했잖아. 온통 패키지 여행 뿐."

 

"각하께선 자유롭게 풀어두면 금세 이상한 사건에 연루되시지 않습니까! 도둑을 잡았다고 연락이 왔을 땐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잘 해결됐으니 됐다고 생각하지만. 사례로 고야도 잔뜩 받았고."

 

 

그러니까 그런 점이~!!

 

이바라는 그가 몇 년 전 여행지에서 저지른 무모한 행동을 떠올리곤 냅다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나기사는 그 일로 점포 주인에게 사례도 받고 지역 단위의 표창장도 받았으며 그 지역에서 흔들리지 않을 팬층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바라는 자신이 그를 아끼는 만큼 그 자신도 터무니없는 행동을 자제해줬으면 했지만 소용 없을 거란 생각에 한숨을 쉬며 재차 나기사에게 물었다. 서류는 진작 테이블에 내려둔 채였다.

 

 

"유독 작년부터 자신과의 휴가에 집착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친목과 소속감을 원하시는 거라면 매년 가는 에덴 단체 여행이 있을 텐데요."

 

"…응. 하지만 이바라와 단 둘이서 여행을 간 적은 없었으니까. 나도 이브의 두 사람처럼 여름 바다에서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

 

"확실히 아담은 이브처럼 따로 놀러간 적이 없습니다만……."

 

 

'아니, 하지만 각하께선 분명 작년 여름에 바다에 다녀오셨을터. 직접 찍은 바다 사진도 멤버들에게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나기사가 그때 보여준 사진은 이바라도 분명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생생한 현장감에 보기만 해도 청량한 사진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던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파도에 부서지는 노을,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 그 앞에서 젖은 모래를 맨발로 밟고 서 있던 나기사. 눈부시게 아름답고 쓸쓸한 풍경에 압도되어 이바라는 무심코 할 말을 잃었으니까.

 

이바라의 생각을 읽은 듯 나기사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건넸다.

 

 

"…저기, 이바라. 세상의 다양한 풍경들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거 알고 있어? 만물의 근원인 바다 또한 그 중 하나지. 나는 바다의 정취를 좋아해. 바람에 실려오는 바다의 냄새도, 눈앞에 광활히 펼쳐진 수평선도.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도. 젖은 모래를 맨발로 밟았을 때의 감촉과 모래 위에 남는 발자국 전부. 혼자 보는 바다도, 모두와 함께 보는 바다도 나는 좋아하지만……."

 

 

그가 눈을 살짝 내리깔고는 말을 길게 늘어뜨리다 말을 끝맺지 않고 이바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정말로 바빠서 거절하는 거라면 납득할게. 하지만 만약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이번엔 고개를 끄덕여줘. 넌 똑똑한 아이니까 언제까지고 이런식으로 피할 순 없단 걸 잘 알고 있겠지."

 

"…………."

 

 

이바라는 말없이 허벅지 옆에 둔 제 손을 꾹 주먹 쥐었다. 자신의 수작 같은 건 진작에 간파한 듯 그가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데도 그 눈빛은 한없이 다정해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쿵쿵 심장이 뛰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당장에라도 일어나 자리를 뜨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이바라를 감싸 달래듯 나기사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이바라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어."

 

 

그의 눈에서 순간 노을진 바다를 본 것 같다고, 이바라는 생각했다.

 

 

 

 

 

 

1.

 

 

"설마하니 자신이 이렇게 감상적인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

 

"밥 먹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저 식사하시죠, 쥰."

 

 

일주일 전, 나기사의 말에 결국 이바라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바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내 각하의 여름휴가에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적당히 흘려보내야 한다는 판단에 한 말이었다. 똑똑하고 고집이 센 그를 무작정 거절하는 건 위험했다. 그는 요 몇 년 사이 급격한 자아 성장을 통해 부쩍 어른스러워졌고, 또 그만큼 저지를 수 있는 돌발행동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일에 지장없이 그를 거절하며 그가 자신의 지시에 따르도록 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하면…….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말한 이바라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상대의 표정을 봤을 때,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나기사가 정말로 기쁜 듯 아이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바라, 이번 여름엔 나기 선배랑 놀러간다면서요?"

 

 

푸흡, 물을 마시던 이바라가 그 말에 거하게 사레에 들렀다. 연신 콜록대며 기침을 하는 이바라에게 쥰이 놀란 듯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그거?"

 

"누구한테라니… 나기 선배한테 직접 들었는데요. 최근 계속 기분 좋아보였으니까."

 

"아, 아아. 네, 이번 여름휴가 땐 같이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헤에, 잘 됐네요."

 

 

잘 됐다고? 뭐가 잘 됐다는 거지?

 

왠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뉘앙스에 미간을 찡그리곤 "뭡니까, 그 기특한 반응은?" 하고 묻자 쥰이 변명하듯 말했다.

 

 

"아뇨. 이바라, 작년에 나기 선배가 휴가 간 동안에는 정신없이 일만 했잖아요. 간신히 시간 날 땐 멍하니 있었고. 솔직히 안쓰럽다고 해야하나, 무서웠거든요 그거. 과로사 하는 줄 알았다고요."

 

 

확실히 그렇긴 했다. 그때의 이바라는 스스로 생각해도 답지않았다. 바쁘단 이유로 나기사를 혼자 휴양지에 보내놓고, 마치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일을 했으니까. 정작 그걸 볼 상대는 곁에 없었음에도. 하지만 그건 상대가 자신을 일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흔들어놨기 때문이 아니던가?

 

 

"아무튼 이번엔 좀 여유가 생긴 거죠? 이참에 푹 쉬고 오는 게 어때요."

 

"그렇게 해야겠군요, 모처럼의 휴가니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선 말투에도 살갑게 대하는 상대의 말에 이바라는 그간의 긴장이 살짝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야 어찌됐든 다른 사람들 눈엔 두 사람의 상황이 그렇게 보이는 거다. 그래, 이건 휴가다. 어쩌면 단순한 여름휴가에 자신이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왠지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기색의 이바라에게 쥰이 말했다.

 

 

"피부 탄다고 너무 방 안에만 있진 마세요. 사진도 많이 찍고요. 일감 가져가지 마시고."

 

"예예. 알겠습니다."

 

"살찐다고 너무 적게 먹으면 안 돼요?"

 

"알았다고."

 

 

 

 

 

 

2.

 

 

매년 여름, 이브가 여름휴가를 즐기러 떠나면 아담 역시 계획해둔 대로의 여름휴가를 즐기곤 했다. 정확하게는 나기사만이.

 

날이 쾌청하고 온갖 경관이 아름답게 비쳐보이는 여름은 성수기다. 관광 사업 뿐 아니라 교통, 패션, 지역 교류 등 사업가로서는 예민한 시기였다. 들어온 일감을 고르고 자금을 유통하며 코즈프로의 내년 내후년 계획을 세우느라 이바라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단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바라가 나기사를 따라다니며 직접 케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이바라는 여름 이맘 때쯤이 되면 나기사의 취향과 최근 관심사에 맞춰 몇 군데인가의 후보지를 골라 나기사에게 팜플렛을 보여줬다. 그가 원하는 곳을 고르면 그 다음엔 이바라가 준비를 마쳐 나기사를 그곳에 보낼 뿐이었다.

 

나기사는 별 불평 없이 여름휴가를 즐겼다. 다녀오고 나서는 멤버들에게 기념품을 나눠주거나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멤버들과 여행 소감을 나누는 그는 순수하게 만족하는 표정이었기에 이바라는 그가 자신 없이 보내는 휴가를 마음에 들어한다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한 거다.

 

 

나기사가 아니었다면 이바라는 지나치게 쾌적하고 숨만 쉬어도 돈이 지출되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필요한 휴식 외에 어딜 가서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는 일이 드문 이바라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시간은 아까웠다.

 

 

'…아니, 드물다기 보단 아예 처음인 것 같은 느낌이. 이브의 두 사람이야 원체 거리감이 가까우니 둘만의 여행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아담으로서는 어떨까요. 이런 건 조금 낯설군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바라는 옆좌석에 앉은 나기사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는 눈앞으로 흘러가는 경치에 기분 좋은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저 두근거리게 만들만큼 자연스럽고 온화한, 기분 좋은 미소였다. 이바라는 작게 심호흡하듯 숨을 내쉬고는 명랑하게 웃으며 나기사를 향해 말을 건넸다.

 

 

"각하, 목이 마르진 않으신지요! 시원한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창밖을 바라보던 나기사가 이바라를 돌아보았다. 저와 눈이 마주치고, 부드럽게 풀어지는 가는 눈매를 보며 이바라는 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지금 그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비명을 지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상한 톤으로 말했다.

 

 

"…난 괜찮아. 이바라는?"

 

"이런, 자신을 되려 걱정해주실 줄이야. 각하의 넓은 마음에는 정말이지 감복하게 되는군요! 자신은 괜찮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길!"

 

"…그래. 늘 고마워."

 

"아뇨아뇨, 이 정도는 기본이죠."

 

"…………."

 

 

나기사는 말없이 손을 뻗어 이바라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볍게 두어 번 쓰다듬었다. 대견한 아이를 칭찬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작은 동물을 쓰다듬는 손길 같기도 했다. 달리 할 말이나 행동을 찾지 못한 이바라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나기사가 만족한 듯 손을 떼어내곤 다시 앞을 바라봤다. 

 

 

'손 잡는 거야 그렇다 쳐도 쓰다듬는 건 몇 년이 지나도 적응 안 되는군요.'

 

 

타고난 거리감이 가까운 나기사가 자연스레 다른 사람의 손을 잡거나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는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사람에게 닿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쓰다듬는 것만큼은 레어하단 느낌도 듭니다만… 어째 쓰다듬어질 때마다 아이 취급 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단 말이죠. 각하께서 만족하신다면야 얼마든 상관없지만.'

 

"…기대되네."

 

 

나기사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바라가 고개를 들어 예? 하고 되물었다.

 

 

"…이렇게 사적으로 둘이서 여행하는 건 처음이니까.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도."

 

"아, 그렇군요! 확실히, 여름휴가 때는 저희 두 사람이 따로 휴가를 보내곤 했으니까요."

 

"…응. 그래서 내겐 이번 휴가가 굉장히 특별해."

 

재밌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나기사가 시트 위에 놓인 이바라의 손을 살짝 겹쳐잡았다. 이바라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나기사는 이바라가 "저 역시 그렇습니다!"라 말하며 슬쩍 빼낸 손을 다시 잡지 않았다. 대신 눈만을 살짝 굴려 이바라를 바라보다 다시 앞을 바라보며 무던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사진을 올려볼까."

 

"사진 말입니까?"

 

"…응. 히요리 군처럼 아담 SNS 계정에도 여름휴가 사진을 올려보고 싶었거든."

 

"역시 각하,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아담 계정에는 아무래도 팬들이 친밀감을 쌓기엔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까, 남색이나 흑백의 대조가 강한 사진들이 많으니 말이죠. 아담도 이브처럼 여름휴가를 즐기는 사진을 올리면 팬들에게 친근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가볍게 말하는 이바라의 말을 나기사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즐거운 여름휴가의 추억을 만들어 보도록 하죠!"

 

"……그래."

 

 

이바라는 생각했다. 완벽한 예약 시기와 장소, 호텔에 도착해서 할 일과 돌발상황의 충분한 시뮬레이션. 자신이 그의 기행에 당황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각하께서 최고의 휴가를 만끽하실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준비했습니다. 다시없을 최고의 여름휴가를 선물해드리죠! 자신 따윈 신경쓸 틈도 없을 겁니다!'

 

 

이바라는 저를 바라보는 나기사의 시선도 눈치채지 못한 채 투지를 불태웠다.

 

 

 

 

 

 

3.

 

 

호캉스의 장점은 단언코 압도적인 편의성이다.

 

깔끔하고 넓은 공간, 늘 쾌적한 상태로 조절되는 온도와 습도.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오션뷰.

 

그 뿐인가? 딜리버리 서비스를 이용하면 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고 청소나 세탁 또한 호텔 측에 맡기고 자리를 비우면 알아서 해결해줬다. 마땅한 비용을 지불하면 여러가지 노동을 할 필요 없이 오로지 쉬는 것에만 전념할 수 있다.

 

 

이바라는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자신이 예약한 룸을 둘러보았다.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푸른색 바다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창가 쪽에 놓인 소파와 작은 원형 테이블, 모던한 액자와 가구들로 꾸며진 방. 중앙의 벽 앞에 놓인 두 개의 더블 사이즈의 침대 사이에는 조명이 놓여진 원목 협탁이 있었다.

 

 

'다소 사치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돈을 쓴 만큼 확실한 서비스군요. 만족스럽습니다.'

 

 

한 달 전, 이바라의 "방을 따로 잡을까요? 아니면 같이 쓰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나기사는 "…같이 쓰는 게 좋아."라 답했다.

 

 

"에덴끼리 온천 여행을 갔을 때도 한 방을 썼잖아. …이미 동거하고 있고."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건 상대와의 유대감을 강화하는데 좋다. 친하지 않은 상대라도 생활을 공유하다보면 거리가 가까워지고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 가족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기사가 만약 자신에게 에덴이란 소속감 외에도 가족 같은 느낌을 요구한다면 이바라는 기꺼이 들어줄 수 있었다. 그건 이바라가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이상적인 비즈니스 유닛이라 하더라도 멤버들끼리 깊은 유대감으로 이어진 유닛이 가끔씩 보이는 기적은 따라하기 힘들었다.

 

 

'가끔 그러다 망하기도 하지만요. 너무 친밀한 관계는 경계심이 흐려져 내부나 외부의 변화에 둔해지기 마련입니다. 뭐, 그걸 경계하는 게 제 일입니다만.'

 

 

실없는 생각을 관두곤 이바라는 침대에 걸터앉은 나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각하, 이 호텔엔 실내 수영장과 스파, 노래방과 뷔페 등의 시설이 있습니다. 어딜 둘러보셔도 상관없지만 저희는 아이돌이니만큼 주점과 카지노만큼은 각별히 주의해주시길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어."

 

"자, 그럼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그렇네. 바다도 좋지만 일단은 배가 고픈데."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 후에 바다를 보러 가시죠. 강한 햇볕에 피부가 타지 않도록 사전 준비가 필요합니다. 각하께서도 부디 협조해주시길!"

 

 

 

* * *

 

 

 

점심에 보는 여름 바다는 무척 아름다웠다. 쾌청한 하늘과 밀려온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갈매기 울음 소리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사박 무너지는 모래의 감촉은 그야말로 여름휴가란 느낌이었다.

 

 

"각하, 덥지는 않으십니까?"

 

"…응. 적당해. 바람도 시원하고."

 

"그건 다행이군요. 만일을 대비해 시원한 물과 쿨 팩을 준비해왔으니 더우시다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점심을 먹고 바다에 나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바다에 가기 전부터 준비시간이 긴 이바라였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떠있는 시간을 피하고 싶은 이바라의 마음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였다.

 

 

"…이렇게까지 해야돼?"

 

"물론입니다. 자외선은 피부의 적, 각하의 백옥 같은 피부를 태양 아래 무방비하게 노출시킬 순 없습니다!"

 

"…인간의 피부엔 어느 정도 자연치유 능력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안 됩니다! 저희 아이돌에게 있어 외모란 귀중한 자산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언제 어디서든 팬에게 노출되어도 괜찮도록 평소부터 철저히 관리해야합니다!"

 

"…응. 이바라는 늘 철저하네. 그러니 너를 믿고 있는 거지만."

 

"이 정도는 각하를 모시는 몸으로서 당연한 일이죠. 앞으로도 이 사에구사 이바라만 믿고 따라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반드시 각하를 세계의 정상에 올려드릴 테니까요!"

 

 

나기사는 하하핫 웃고마는 이바라에게 손을 뻗어 그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이바라가 뒤로 물러나며 피한 탓에 나기사는 그럴 수 없었다.

 

 

"…아."

 

"왜 쓰다듬으려 하시는 겁니까? 몇 번이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자신은 아이가 아니니까 말이죠? 어린 취급은 그만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바라도 블러디 메리를 맡을 때마다 귀여운 듯 쓰다듬잖아."

 

"그건 동물과 애착 관계를 형성해 돌보기를 수월하게 하기 위함으로써 한 일로─ 그보다 보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나기사를 보며 이바라는 정말이지 경계를 풀 수 없단 생각을 했다. 원래도 주변을 넓고 예리하게 살필 수 있는 그였지만, 최근엔 특히나 다른 사람의 미세한 변화나 움직임을 빠르게 눈치채곤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바라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야말로 매의 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아."

 

 

이바라는 자신이 방심한 틈에 다시 한번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기사는 만족한 듯 후후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아이 취급은…."

 

"…메리."

 

"동물 취급도 안 됩니다!"

 

 

발끈한 이바라의 말에도 나기사는 그저 웃었다. 이바라는 그 여유가 흘러넘치는 모습을 탐탁치 않은 듯 바라보다 나기사에게 비치볼을 하나 건네주었다. 나기사는 이바라의 의도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듯 공을 들고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고 서있었다.

 

 

"자신이 하려는 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각하?"

 

"…응. 비치 발리볼이네. 해변가에서 주로 하는 공놀이인 거지. 배구와 닮았지만 공도 활동 범위도 훨씬 더 가벼운 여름의 스포츠야."

 

"정답입니다! 이야, 바다까지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건 조금 아쉬우니 말이죠. 그렇다고 물 속에서 하는 활동은 위험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나름대로 해변에서 즐길 것을 준비해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자신과 승부 한 판 어떠십니까? 이기면 나름대로의 보상도 있다고요~?"

 

"…후후. 마치 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네. 이바라도 나도 이제는 아이가 아닌데 말이지. 자길 아이 취급하는 건 싫어하면서."

 

"그건 이제와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 승부를 시작해보죠. 아무리 각하라도 봐드리지 않을 겁니다!"

 

"…좋아. 잘 부탁해.

 

 

 

* * *

 

 

 

"…해변가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라면 수박 깨기도 해보고 싶은데."

 

"그건 부상의 위험이 있으니 안 됩니다."

 

"…다음 여름 예능 때는 해볼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안심하시길!"

 

 

가볍게 시작한 승부에 어느새 진심이 되어 서로에게 볼을 던지던 것도 잠시, 그늘에서 체력과 수분을 보충하고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해변을 걷던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 해가 뉘엿하게 지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노을 아래 짙은 보라색 수면이 자잘이 물결치는 해변의 풍경은 누구든 잠시 멈춰 서 그곳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꽤나 아이처럼 즐겨버렸군요. 아무 생각 없이 진심으로 승부하며 놀았단 점에서 왠지 보기 타임 때의 데자뷰가 떠오릅니다만.'

 

 

하지만 그 자신도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꼈기에 이바라는 불평없이 힐끗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나기사를 바라보았다. 몇 개인가의 조개를 주워 하늘에 비쳐보며 관찰하던 나기사가 지금은 말없이 그늘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기사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탁 트인 바다에서의 그는 자유로운 새를 닮았다고 이바라는 생각했다. 긍지 높고 예리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아래에 두고는 사랑한다.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는 늘 이런 표정을 짓고 있던 걸까. 세상을 자유로히 여행하다 자신이 만든 둥지로 돌아와 자기가 본 풍경을 이야기 하곤 했던 걸까. 그건 조금 불안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무척 마음에 들어. 예전에 본 바다와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는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느껴지는 경관이 다르단 건 신기하네."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바다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풍경이 달라보이는 곳이니 말이죠."

 

"그것도 그렇지만… 오늘은 네가 옆에 있기 때문이겠지. 네가 없었다면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을 거야."

 

"…그건 과분한 말씀이군요!"

 

"…어울려줘서 고마워, 이바라."

 

"아뇨아뇨, 별 말씀을."

 

 

이바라는 조마조마함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온화한 미소를 띄우던 나기사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다의 노을은 무척 짧은 거, 알고 있어?"

 

"…예?"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빛이 사라지곤 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는, 진귀한 시간이야."

 

 

노을 바다는 아름답다. 해변에 드문드문 보이던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홀린 듯 하늘을 바라보다 저녁을 먹으러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를 배경으로 두 사람만이 해변에 남아간다.

 

 

"각하…,"

 

 

이바라가 상대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기사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왔기 때문이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 바람에 실려오는 바다 냄새. 끝없이 이어지는 해변의 풍경. 세상이 마치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도는 듯한 감각에 이바라는 그만 아찔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빙빙 도는 현기증 속에 자신을 흔들림없이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있다. 이바라는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 상대가 엄지로 눈 밑을 살살 쓸어내는 감각에 정신을 차린 듯 그를 밀쳐냈다. 나기사는 별말 없이 순순히 손을 떼어내곤 물러나주었다.

 

 

"별난 일이군요. 각하께서 제 얼굴을 이런식으로 어루만지시다니… 자신의 눈밑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이바라."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죠! 이제 곧 저녁 시간이니까요. 식사는 어디서 드시겠습니까? 호텔 식당? 카페? 아니면 역시 딜리버리 서비스로 방에서 쾌적하게─"

 

"이바라."

 

"…………."

 

 

나기사가 돌아 앞서나가는 이바라의 손목을 잡았다. 뿌리치면 바로 풀 수 있을 정도로 약한 힘이었음에도 이바라는 온몸이 묶인 것처럼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침묵하는 이바라의 등 뒤로 "…여기 봐줘."란 목소리가 들렸다. 이바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이라면 자신이 긴장하고 있단 걸 세상의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바라가 굳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뒤돌아보지 않자 나기사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곤 천천히 이바라의 뒤로 다가가 그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어느새 제법 서늘해진 바닷바람 속에서 온기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두근거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분명 길면서도 짧은 시간이었다. 영원할 것 같으면서도 눈을 돌리면 금새 끝나버릴 것 같았다. 이바라가 초조함에 주먹을 꾹 쥐었다 펼 때쯤 나기사는 그를 놓아주었다.

 

 

"…저녁 이야기였지?"

 

 

아무 일 없었단 듯 그가 이바라의 옆에 서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녁은 호텔 뷔페에서 해보고 싶어. 근처 레스토랑도 좋겠지만, 저번에 갔던 호텔과 맛을 비교해보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이바라는 정말이지 그의 애정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4.

 

 

바다로부터 돌아온 두 사람은 씻고 저녁을 먹은 뒤 넓은 호텔 부지를 돌아다니며 여유 시간을 즐겼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의 다소 어색한 기류를 이바라는 필사적으로 무시하고 있었고 나기사 또한 더 이상의 기행을 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남은 시간을 평소대로의 거리감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협탁 위의 조명을 킨 이바라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누웠다. 불이 꺼진 룸 안에 은은한 조명 빛이 퍼졌다.

 

 

나기사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정적에 녹아들었다. 꽤나 돈을 들여 지은 듯한 호텔은 두 사람이 입을 다문 것 만으로도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나기사는 눈을 감고 조용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있으면 몸이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에 물처럼 녹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날 잠을 청하기 위한 행위였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기척을 죽이고 잠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숫자를 삼백까지 센 나기사가 조용히 눈을 뜨곤 이불을 걷어냈다. 몸을 일으켜 호텔 바닥에 조심스레 맨발을 딛으면 피부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털 카펫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한 손에 베개를 집어들고 조심조심 이바라의 침대로 다가가는 건 마치 들키면 안 되는 장난을 치는 것 같아 설렌다. 나기사는 이바라의 머리 옆에 베개를 놓아두곤 이불을 열어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늑한 느낌과 옆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나기사는 만족스러운 듯 이불을 덮곤 누웠다.

 

이바라가 일어나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나기사를 쳐다봤다.

 

 

"…안녕, 이바라. 아직 안 자고 있었네. 아, 혹시 내가 깨웠어? 그렇다면 미안해."

 

"굳이 따지자면 아직 깨어있던 게 맞습니다만…."

 

 

이바라는 노골적으로 성가시단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나기사를 바라보았으나 곧 아무말 없이 옆으로 비켜 그가 충분히 누울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굳이 시간을 들여 그를 설득하느니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듯 했다. 나기사가 기쁜 듯 옆으로 누워 이바라를 바라본다.

 

 

"…이바라도 잠이 안 오는 걸까. 그럼 나와 대화하자. 대화하다보면 마음이 편해져서 잠이 잘 오니까."

 

그건 상관없지만…, 이바라는 말하다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곤 나기사 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무드등을 등진 나기사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니 꼭 소꿉놀이라도 하는 느낌이 들어 이바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각하,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신지요?"

 

"…아니. 무척 마음에 들어. 푹신하고 부드럽고 따뜻해."

 

"그럼 왜 굳이 자신의 침대에 기어들어온 건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바라와 같이 자고 싶어서."

 

"…………."

 

 

나기사의 대답에 이바라는 예상했단 듯 별다른 대꾸없이 누워있었다. 안경을 벗고 언제든 잠들 수 있는 상태의 이바라는 귀찮아보였다. 어딘가 될 대로 되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기사는 그런 상태의 이바라를 사양않고 맘껏 이용하기로 했다.

 

 

"…불편해?"

 

"…불편하진 않지만 조금 낯설군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자본 적은 없어서요."

 

"…한 번도?"

 

"예. 시설의 침대는 좁아서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찼습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 침상에 들어올 일도 없었고요."

 

"…난 있어. 히요리 군과 같이 살 때… 이런식으로 종종 같이 자곤 했어."

 

"하하, 전하께선 상냥하시니까요."

 

"…너도 상냥한 아이야."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자신을 향해 그런 말을 하는 건 이 세상에 각하밖에 없을 겁니다."

 

 

조금 누그러진 이바라의 분위기에 나기사는 안심했다. 나기사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면 잠이 잘 와. 안심하고 잠들 수 있어."

 

"그렇군요. 언젠가 기사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체온은 심신 안정과 깊은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요. 뭐, 자신에게는 해당없는 일입니다만."

 

"…그래?"

 

"예. 안타깝게도 자신은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것보다 혼자 있을 때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지라. 말이 나오는 김에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자신이 눈을 감고 있을 땐 제 곁에 기척없이 다가오지 말아주십시오. 실수로 반격 할 수도 있으니까요."

 

"…자는 동안에도 경계를 풀지 않는구나."

 

"하핫, 자고로 자는 동안이 가장 무방비한 상태이지 않습니까. 아직은 죽고 싶지 않은 겁니다."

 

 

가볍게 웃은 이바라는 잠시 입을 다물곤 나기사를 빤히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각하, 자신은 이런 사람입니다."

 

 

정말로 많은 것이 담겨있는 말에 나기사는 이바라의 표정을 느릿하게 살피다 입술을 떼었다.

 

 

"…어떤 사람인데?"

 

"사랑도 애정도 단편적인 정보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사람이요. 알게되는 사람마다 경계하고 날을 세우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물론 믿는 사람조차 사적으로 옆에 두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바라가 명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조금의 애상도 아까운 사람이죠! 아, 하지만 연민은 하지 말아주시길, 한탄하려는 게 아닙니다. 자신은 이런 제 모습에 제법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감정적으로 굴어 일을 망칠 가능성이 낮단 점에선 오히려 다행스럽기까지 합니다."

 

 

나기사는 정말로 자랑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이바라를 말없이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하지만 이바라는 내가 곁에 다가오는 걸 허용해줬잖아."

 

 

천천히 자아내는 말에 이바라는 입을 다물었다. 나기사는 느릿하지만 확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혼자가 편하다고 말한 네가, 내게 자리를 내어줬어. 다가오지 말라며 경고하면서까지."

 

"……그건, 각하께 감히 손을 휘두를 순 없으니까…."

 

"…어떤 이유든 기쁜 거야. 이런식으로 네 옆에 있을 수 있는 게."

 

"…………."

 

 

부드럽게 밀어내는 말에도 되려 붙잡아오는 나기사의 모습에 이바라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오래 전부터 그랬다.

 

 

왜 하필이면 자신일까. 세상 만물을 좋아하는 듯 구는 그가 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까……. 나기사가 로맨스 장르에 꽂혀 작품을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준 게 문제였을까? 생각해보면 나기사는 그 전부터 이미 본인의 감정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으리라.

 

가지고 있던 호기심이 해소되면 금방 대상에 관심을 거두는 그였다. 세상은 넓고 그의 흥미를 끌만한 것들은 많았으니까. 그러니 이바라는 나기사가 자신에게 가지는 관심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사그러질 거라 생각했다. 그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단 걸 안 건, 나기사가 그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진심, 애정을 숨길 수 없는 눈빛. 자신과 시간을 함께 보낼 때마다 보이는 만족스러운 기색과 어떤 종류의 갈망을 동시에 접할 때면 이바라는 답답함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자아를 가졌으면 했다. 하지만 이런 걸 원하진 않았다. 자신은 이런 걸 바란 적이 없다.

 

그는 완전무결한 신이어야 했다. 사랑을 알고, 한낱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됐단 말이다!

 

 

"각하."

 

"……응."

 

 

역시 따로 자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바라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나기사가 손을 잡아 부드럽게 깍지를 껴왔기 때문이다. 맞잡은 손가락 사이로 두근거리는 박동이 전해져왔다. 두렵고 또 조심스러운 박동이었다. 이바라는 어쩌면 그게 자신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명을 등지고 새어나오는 불빛 속에서 나기사가 웃으며 바라보는 탓에 이바라는 더 이상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각하께서는…"

 

 

몇 번 입을 달싹이던 이바라는 나기사가 그랬듯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는 혹시 제게 따로 바라는 게 있으십니까?"

 

 

그건 정말로 순수한 의문이었다. 몇 개인가의 상대를 밀어낼 말을 제치고 그가 꺼낸 자신의 감정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있다고 하면 들어줄래?" 

 

"…………."

 

 

당황한 기색도 없이 나기사는 그렇게 되물었다. 이바라는 상대의 의중을 읽어내듯 나기사의 눈을 바라보다 이내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께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몇 년 동안 곁에서 지켜보며 이제서야 당신을 조금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이상한 행동을 하시잖습니까."

 

"…예를 들면?"

 

"각하께선 마치 자기가 상대에게 특별한 존재란 걸 확인받고 싶어하는 아이처럼 굴고 계십니다."

 

"…그건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사는 인간에게 있어 당연한 욕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정도가 지나칩니다. 어리광이라도 부리시는 겁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라도?"

 

"…네게 부족하게 느끼는 점 같은 건 없어. 하지만… 그러네. 어쩌면 어리광이 맞을지도. 네 관심을 끌어, 약한 면을 이용해 실컷 응석부리고 싶으니까."

 

"…………."

 

"…이바라는 내게 특별한 거야. 아버지나 에덴의 멤버들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이바라는 손을 붙잡힌 탓에 이마를 짚을 수 없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차라리 확실하게 원하는 걸 요구하면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 상황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피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바라는 그동안 상황을 외면하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 채 저를 흔드는 나기사를 원망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바라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나기사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그의 가슴위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일정한 리듬으로 닿아오는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상대를 재우려는 듯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알고 싶어?"

 

"……뭐를 말입니까."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주실 겁니까?"

 

"…이바라가 바란다면."

 

"…………."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건 희미한 불안 때문이었다. 자신이 외면했던 사실과 언젠가는 마주해야 했을 감정을 앞에 뒀기 때문이다. 이바라는 꿀꺽 침을 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기사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장가처럼 부드럽고 작별 인사처럼 가벼운 목소리였다.

 

 

"…이바라를 좋아하니까."

 

"…………."

 

"……이바라가 좋아."

 

"…이바라와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이바라의 모습을 나만이 보고 싶다고 한다면 너무 큰 욕심인 걸까?"

 

 

그가 내뱉은 사랑의 말은 가볍고 담담했지만 그 감정만큼이나 깊고 짙었다. 이바라는 나기사가 흘러나오는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눈으로 저를 바라볼 때마다 머릿속에 되뇌이던 수많은 거절 멘트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벙긋거리다 겨우 진실된 한 문장을 입에 담았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지만 자신은 그 말에 저 역시 그렇다고 대답해드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최대한 절제했다고 생각했음에도 입에서 튀어나온 건 축축한 문장으로. 이바라는 자신이 이토록 감정에 솔직한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말한다 하더라도 각하께서 바라시는 건 분명 그런 게 아니겠죠. 저는 각하께서 만족하실만한 대답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바라가 쥐어짜내듯 한 말에 나기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는 이바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난 이바라가 방금 한 대답만으로도 만족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역시나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나기사가 손을 뻗어 흘러내린 이바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바라가 지금처럼 고민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는 거야."

 

 

거짓이라곤 한점없이 올곧게 자신을 향하는 말과 시선, 귀가 드러났을 뿐인데도 그에게 모든 걸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바라는 불에 댄 듯 화끈해졌다. 그런데도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어 이바라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건 분명 그 때문이다. 분명 말에, 행동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아오는 그의 표현 방식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거다. 그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그가 자신에게 물들 듯 자신도 그에게 물들어….

 

 

이바라는 나기사가 제게 그러했듯 손을 뻗어 그의 뺨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엄지로 눈밑을 살살 쓸어보았다. 아쉬운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확인하려는 것 같기도 한 손길이었다.

 

나기사는 뺨 위에 얹힌 손을 떼어내지 않고 상대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려 조심스레 움켜잡았다. 마치 제게 닿은 온기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드는 듯한 모습에 이바라는 자신의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자신의 감정을 부딪혀오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불확실한 미래따윈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밀어낼 때마다 확신을 가지고 접해온다.

 

나기사는 이바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자신의 생각을 하느라 깊은 바다에 잠겨가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말없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용히 감정이 일렁이는 것이 마치 바다의 물결과 같다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그건 무척이나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나기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감정에 "…이바라,"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침내 이바라가 깊은 바다로부터 끌어올려져 다시 상대를 온전히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기사가 이바라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네가 어떤 대답을 하든 우리가 가는 길엔 지장 없을 거야. 약속해. 그저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을 뿐이니까."

 

 

"…잘 자, 이바라. 내일 또 봐."

 

 

그리고 나기사는 할 말을 마친 듯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바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기가 찬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 천장을 바라보며 다시 몸을 눕혔다. 잠은 어느샌가 달아나있었다. 이바라는 또 눈 깜빡할 새 그의 페이스에 사정없이 휘말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응어리진 감정이 풀어진 듯한 안락함과 후련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순된 감정 속에서 옆자리의 온기를 느끼며 이바라는 그저 눈을 감았다.

 

 

 

 

 

 

5.

 

 

"…이바라는 내게 특별한 존재야."

 

 

그가 그렇게 말을 걸어온 것이 불과 2년 전. 언제든 세상 만물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곤 하는 그였기에 이바라는 별다른 생각없이 경례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다니 무엇보다 영광이군요! 네, 저 역시 각하를 무엇보다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네게 난 대체불가능한 존재일까?"

 

"물론이고 말고요! 단언컨데 이 세상에 각하보다 완벽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하께선 존재만으로도 대체불가능한, 자신이 고심 끝에 고른 소중한 최종병기니까요!"

 

"……최종병기."

 

"예.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만 곁에 있다면 이 사에구사 이바라에게 두려울 건 없습니다! 어떤 전장이라도 능숙히 해치워나갈 자신이 있죠. 그러니, 자신은 어떤 짓을 해서라도 각하를 제 곁에 모실 생각입니다."

 

"…………."

 

"쉽게 놓아드리지 않을 겁니다, 하핫!"

 

 

그 말에 나기사는 부드럽게 눈매를 끌어내렸다. 어딘가 안심한 기색이었지만 순수한 기쁨의 색보다는 어딘가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표정이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나? 그 모순적인 표정에 의아해진 이바라가 입을 열려던 찰나 나기사가 말했다.

 

 

"…이바라가 좋아."

 

"…? 네. 저도 각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애하는 마음을 표현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할 터, 무엇보다 각별한 존재이신 각하께서는 만인에게 사랑 받으실 자격이 있지요!"

 

"…정말?"

 

"네!"

 

"…그럼 이바라는 나를 사랑해?"

 

 

그 말에는 과연 이바라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바라는 몇 마디 애정의 말쯤은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게 사에구사 이바라란 사내였으니까. 단순한 말 한마디일 뿐이다. 말을 내뱉는다고 해서 마법처럼 자신이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뭔가가 치명적으로 잘못될 것 같다는 느낌에 이바라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각하, 당신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자신은 사랑하고 또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물며 당신은 저를 옆에 두고 고작 그런 소꿉장난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바라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표정에 걸린 미소는 평소보다 비릿했다. 그가 혀 끝에 독을 품곤 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각하. 자신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가 경애해 마지않는 각하께 감히 거짓으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할 순 없겠으나,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자신이 그의 수중에서 가져온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입니다. 그다지 그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요. 그가 없었어도 자신은 어떻게든 각하를 찾아냈을 테니. 그야 당신과 저는 재능과 수단, 목표까지 일치하는 훌륭한 파트너이지 않습니까."

 

"…………."

 

 

명백한 의미의 말을 뱉은 뒤 이바라는 홀가분한 듯 평소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랑이란 감정에 관심이 생기신 겁니까? 그렇다면 참고할 만한 작품들을 몇 가지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사랑이란 훌륭한 것이죠. 그야말로 인간 본연의 감정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니 자신이 마치 살아있는 시체가 된 기분입니다만은."

 

 

그 때의 대화는 분명 이렇게 끝났다. 나기사는 이바라가 추천해준 몇 편인가의 책과 영화를 진지하게 감상했다. 이바라는 나기사가 자신의 완곡한 거절을 알아들었다 생각했다. 실제로 나기사는 히요리가 질색하던 로맨스 소설이나 쥰이 빌려준 순정 만화, 사랑을 노래하는 뮤지컬, 비극적인 고전 소설, 뇌과학과 심리학 서적 등을 읽으며 더이상 이바라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바라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고 안심한 거다. 그가 마지막으로 읽던 책을 덮고는 더 이상 이쪽 자료는 필요없다고 말할 때까지는.

 

 

"이제 흥미가 식으신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궁금하던 건 알았어."

 

"그렇군요, 그건 다행입니다. 역시 각하, 인간에 관한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한 분야의 지식도 곧잘 섭렵하시는군요!"

 

"…응. 네 덕분이야, 이바라."

 

 

그건 무척이나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미소로. 제 앞에선 늘상 어린 아이 같던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이바라는 전신을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불길한 느낌이 든 이바라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나기사는 책을 옆자리에 두며 "…그래서 오늘 변경된 일정은 뭐야? 그걸 말하러 온 거지?" 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내심 당황한 이바라의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어른스러워진 건지, 이바라는 속마음을 숨기며 태연히 다음 일정을 브리핑했다.

 

 

뭔가가 잘못됐다면 그때부터일 거라고 이바라는 생각했다. 아예 상대를 하면 안 됐는데. 하지만 설령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자신이 그의 감정을 외면한 채 그를 컨트롤 하는 게 가능했을까?

 

 

그의 감정과 나의 욕망이 공존할 방법은 없나?

 

 

 

* * *

 

 

 

이바라는 정말로 교활하고 영특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욕망했다.

 

 

그는 스스로를 사랑을 못하는 사람처럼 말했지만, 나기사는 그가 욕망함으로써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기사는 그런 그에게서 사랑을 배우며 이바라가 하지 못하는 단 한 가지의 것을 했다. 이바라는 나기사의 그런 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했다. 틈만 나면 솔직하게 마음을 부딪혀오는 나기사를 보며 한 입 베어문 선악과를 보듯 떨떠름한 표정을 짓곤 했으니.

 

 

 

하늘이 밝아지고 나서도 침대에 파묻혀 있는 이바라는 나기사로선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먼저 일어난 이바라가 그를 깨우러 오곤 했으니까.

 

나기사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곤히 잠든 이바라를 턱을 괴고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나기사가 살짝 손을 떼어내면 이바라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그는 옆에 누워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기사를 보고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 이바라."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나기사가 협탁 위의 안경과 휴대폰을 집어 건네줬다. 미처 잠기운을 못 떨쳐내 부스스한 모습의 이바라를 보며 나기사가 말했다.

 

 

"…동이 트기 전의 바다를 보고 싶었거든."

 

"일출을…?"

 

 

상대의 말에 이바라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곧 한숨 쉬듯 말했다.

 

 

"잠들기 전에 말씀해주셨다면 좀 더 일찍 일어났을 텐데요."

 

"…깨우고 싶지 않았어. 모처럼의 휴가니까."

 

"…각하께선 일찍 일어나셨잖습니까."

 

"…보고 싶었으니까."

 

 

이바라는 굳이 생략된 목적어를 물어보지 않았다. 잠들기 전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기사의 "…아침 바다는 창 너머로 봤어."란 말에 이바라가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물론 이바라가 아주 사소한 기척에도 곧잘 잠이 깨곤 하는 타입이란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나기사는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을 흐트러진 이바라의 모습에 색다른 지식을 접한 것처럼 설렜다. 잠시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던 이바라가 입을 열었다.

 

 

"직접 보러 가시겠습니까?"

 

"…바다를?"

 

"네. 조금 늦긴했지만 아직 해는 뜨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누워있어도 돼."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사진이란 말에 나기사가 눈을 깜빡였다.

 

 

"작년엔 일몰 사진을 찍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금방 준비하고 나올 테니 각하께서도 준비하시길."

 

"…………."

 

"싫으시면 됐습니다."

 

 

침대 밑에 발을 딛으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하는 말에 조금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나기사가 웃으며 "…아니야, 준비할게." 하고 대답했다.

 

 

아침 하늘만큼이나 부드러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6.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침 바다는 꽤 쌀쌀하군요. 역시 방 안에서 보자고 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이바라가 생각했다. 두 사람이 준비하는 동안 해가 어느 정도 떠오른 바다는 푸르스름한 빛을 감추고 어느새 노을처럼 새하얀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이바라는 옆에서 아침 노을을 바라보는 나기사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는 마치 귀중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보였다.

 

 

"춥진 않으십니까?"

 

"…괜찮아. 이바라는?"

 

"자신도 괜찮습니다."

 

"…다행이네. 사진은… 지금 한 장 찍어둘까. 다녀올게."

 

"다녀오시길!"

 

 

카메라를 든 나기사가 이바라의 곁을 떠나 해변을 향해 걸었다. 이바라는 다시 아침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기사가 작년에 찍었던 사진. 그 속에는 해가 저물어가며 생기는 노을 앞에 선 나기사가 있었다. 광활한 풍경은 사람을 작게 만든다.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는 조금 외로워보였다. 젖은 모래를 밟고 있던 발가락 사이로 흘러 빠져나가는 모래가 덧없어 보였다. 이바라는 지금에서야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 광경을 마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노을은 반 시간도 안 돼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막 태양이 바다를 벗어난 하늘은 다시 푸르스름한 옥색을 띈다. 

 

등 뒤에서 들린 모래 밟는 소리에 이바라가 고개만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족스럽게 찍으셨습니까?"

 

"…응."

 

 

나기사가 그런 이바라를 살짝 뒤에서 끌어안았다 풀어주었다. 아이가 응석을 부리는 듯한 모습에 이바라가 웃으며 말했다. 

 

 

"아쉽군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아침 바다를 배경으로 아담의 두 사람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건데 말입니다. 다음 기회는 언제가 될 지 모르겠으니. 매번 시기 적절하게 휴가를 쓸 수도 없고 말이죠."

 

"…괜찮아, 기다릴게."

 

 

이 모든 일에도 나기사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이바라는 나기사가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들 중 가장 진솔하고 기쁜 말을 들려주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말에 흔들리고 고민해주었다. 내년의 두 사람은 지금보다 조금 더 애틋한 관계가 되리라.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자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는 두 사람의 감정이 맞닿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나기사는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이바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진심을 담아.

 

 

"다음에도 너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으니까."

이바랄리볼.png
튜브.png

처음엔 두 사람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곳에서 데이트해줬으면 좋겠다~란 생각으로 썼는데 쓰다보니 배경이 점점 바다로 넘어가더군요. 과연 기다림의 너머엔 뭐가 있을까요? 두 사람의 사랑과 욕망은 공존할 수 있을까요? 나름대로 답을 적어봤지만 확인은 그들만의 몫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쓴 만큼 재밌으셨다면 기쁠 것 같아요.

합작 주최해주신 주최님, 참여해주신 분들, 글을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었어요. 모두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기이바 하세요~!!

님의 후기!

제출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글이나 그림에 대한 저작권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를!

bottom of page